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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널하우스 Oct 22. 2024

불안한 이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

아직 듣지 못한 말들


불안한 이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친절'이고, 달리 말해 '정직'이다. 친절한 말은 머리뿐만 아니라 몸까지 파고든다. 신체 어딘가에 오래도록 미문(未聞, 아직 듣지 못함)으로 남는다. 미문으로 남는 까닭은 언어가 아닌 마음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고 마음은 언어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에 충분히 들을 수 없다.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끝날 수 없다. 그런 고상하고 이상한 말이 불안한 이에게만큼은 가장 정직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불안은 마음을 원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말이 전해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말이 함축하고 있는 논리성도 서정성도 아니다. 단지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은가' 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듣고 싶으려면, 아마도 마음이 전해져야 한다. 


불안은 '상실의 가능성'을 본다. 상실을 지켜보는 우리의 저항감을 불안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증오는 양의 상관관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잃어버릴 것만 같을 때 더없이 소중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부와 명예든, 삶과 사랑이든 불안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하이데거는 불안의 궁극적인 형태를 죽음에서 찾았다. 죽음이 현실에 나타나는 가장 '본래적인' 방식이 불안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죽음을 먼 사건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삶도 친숙한 세속의 늪으로 한없이 '퇴락'하는 삶도 불안의 징후를 감쪽같이 무시할 수는 없다고 한다가장 확실한 상실의 가능성은 죽음이며 이러한 숙명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면 불안도 초월할 수 있을까. 만약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전능자 조이라면 불안도 정복할 수 있지 않을까.



조이의 경우, 소문


그녀는 다중우주 중 하나인 알파라는 우주에서 모종의 실험을 통해 모든 우주에 동 시간적으로 링크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시공간을 초월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들을 목도하고 세계를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도 불안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세상을 망라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막지 못한 것은 '의미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광활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고 단언하는 조이는 결국 인생무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만다. 그녀에게 세상은 더 이상 들을 게 없었고 무의미한 소문만 무성했다. 소문은 이제 충분히 들을 필요가 없었다. 'nothing matters(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경험한 모든 가능성들의 총체는 결국 불가능이었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죽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재생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상실하지 않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불안도 상실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알게 된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상실되지 않고 남는다면 세상은 흐르지 않고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영생이라기보다 어쩌면 가장 죽음에 가까운 모습을 띌 것이다.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가장 쉬운 결단이 된다. 조이는 결국 자신과 세상을 멸하기 위해 블랙홀을 만든다. 세계는 조이에게 무성한 소문, 즉 무의미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에블린의 경우, 불문


에블린은 남편의 말도 딸의 말도 듣지 않았다. 레즈비언인 조이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가족들에게 소개하려고 하지만, 에블린은 인정하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세탁소 운영업무와 세금문제로 남편 웨이먼드의 사사로운 이야기들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동안 불문에 부쳤던 이야기들이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굴러오기 시작한다. 남편의 이혼준비서류들을 발견하게 되고 알파 우주의 조이를 괴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끔찍한 사실도 알게 된다. 그녀의 불문은 가족의 해체를 넘어 세계의 종말 직전까지 다다른다.  


듣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될 때 우리는 묻는다. 묻는다는 것은 듣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 만큼 듣는다. 그리고 듣는 만큼 묻는다. 무한한 가능성과 풍부한 의미의 메시지라 해도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메시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그 역으로 아무런 가능성과 의미를 품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단 전해지기만 한다면 메시지는 제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된다. 무용한 몸짓과 언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메시지는 비로소 의미와 가능성을 발휘하게 된다. 더 나아가 방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에블린은 묻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 세계는 에블린에게 들을 필요 없는 불문, 즉 무시해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웨이먼드의 경우, 미문


웨이먼드는 알파 우주의 조이를 막기 위해 종횡무진 사선을 넘나 든다. 그렇게 현재의 우주에 도착해 에블린을 만난다. 그는 정직하고 친절해야만 한다는 것은 도의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사실 전략적 차원에 가깝다고 말한다. 친절은 공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혼란한 상황에서 결국 상대의 마음을 열어야만 메시지는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만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는 정직함을 통해 안전함을 보증하고, 불안한 당신에게 전하는 이 마음을 조심스럽게 친절에 담아야 할 것이다. 서로가 헤어져 가장 성공하는 우주에서, 서로가 만나 가장 실패한 우주를 긍정하는 남편의 소탈한 고백은 결국 상실의 세계에 갇힌 아내 에블린의 불안을 재생의 세계로 다시 실어 나른다. 그의 진솔하고 다정한 마음은 에블린을 설득하고 에블린 자신이 딸 조이의 가장 소탈한 가능성, 가장 소탈한 의미가 되기로 마음먹게 만든다. 


떠돌아다니는 무의미한 말들이 조이에게는 소문이었다. 에블린은 이를 불문에 부쳤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무엇보다 들을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듣고 싶은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하기를, 허무와 공허를 떨쳐낼 이야기를 누군가 전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허를 채워줄 새로운 의미도 가능성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었다. 그리고 감히 내 멋대로 해석해 보자면 그 마음은 '함께 있기'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경우, 서문


조이가 세상을 멸하기 위해 만든 블랙홀은 베이글 모양이다. 베이글 모양이어야만 했던 것은 그 중심이 마음의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블랙홀로 비유되는 상실의 세계가 죽음을 향한다면, 그곳엔 분명 불안이 있을 것이고, 불안이 있다면 그곳엔 분명 마음이 닿을 것이다. 


신체에 오래도록 남는 친절하고 정직한 미문들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충분히 들을 수 없고 충분히 들을 수 없는 한 함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이는 아마도 그런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 말을 마침내 에블린이 깨닫고 딸에게 정직하게 전하는 이야기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영화는 이 세 명의 가족이 함께 껴안고 웃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다시 끝을 맺는. 수미상관은 대게 자기 완결감이 큰 이야기로 느껴지기 마련인데 나는 아직도 충분히 듣지 못한 것만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오히려 충분히 들을 수 없는 불가피함을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장황한 이야기는 다시 글의 서문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필자의 체념이 불성실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안한 우리에게 세계는 미문, 즉 아직 충분히 듣지 못한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이야기일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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