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

by 널하우스


오랜만에 매거진을 다시 열었다. 셋이서 촬영 스케줄을 맞추는 것도 내실 있는 콘텐츠를 갖추는 것도 여전히 쉽지가 않다. 그래도 서로가 아직 지치지 않고, 함께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 최근엔 ‘일’과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자아실현, 워라밸, 자유와 같은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도마 위로 떠올랐고, 영상 편집을 마친 뒤에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이 지면을 빌려, 영상에 담기지 못한 잔상들을 조금 남겨두려 한다.


먼저 ‘일’이라는 단어부터 짚어보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구글 검색 가장 상위에 있었다) 따르면 '수고와 노고로서의 인간 활동을 의미하는 노동 또는 근로'를 말한다. 이 정의를 기반 삼아 가장 대치되는 활동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취미’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 ‘일하는 것’과 ‘노는 것’,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 짓는다. 워크라이프 밸런스 역시 이런 이분법에서 비롯된 구도일 것이다.


정당한 기여와 정당한 보상, 의미 있는 노동과 충분한 휴식이 바로 워크라이프 밸런스의 핵심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누군가는 의미 없는 노동을 하면서 과도한 보상을 받고, 누군가는 의미 있는 노동을 하면서 부족한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나마 선방이라 볼 수도 있겠다. 의미 없는 노동을 하면서 보상도 적다면 최악일 테니)


의미는 개인이 부여하지만, 그 의미는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조정된다. '당위'는 사회적 요구와 제도 안에서 결정되고 '평가' 역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매개된다. '의미'와 '당위'를 모두 갖춰야 하는 점에서 '일'이라는 것은 철저히 주관적일 수도, 완전히 객관적 일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조율되는, 본질적으로 ‘상호주관적인 행위’라고.


철학적 개념인 ‘자연주의적 오류’와 ‘도덕주의적 오류’도 여기서 떠올려볼 수 있다.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진 사람은 말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유전적으로 다르고,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다른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하다.” 반대로 도덕주의적 오류에 빠진 사람은 말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하니, 타고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1]


이러한 상칭적인 모습은 '일'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은 아닐 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반드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이를 부조리라 느낄지도 모르지만, 자연주의적 오류와 도덕주의적 오류를 경유해 이를 재조명해 본다면, 그것이 반드시 문제가 된다고도 볼 수 없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과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사실 그만큼 '밀접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교훈은 단지 개인의 내면적 의미를 곧바로 사회적 정당성에 투영해서도, 사회적 정당성을 개인의 내면적 의미와 동일시해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그 자체가 구조의 문제인지, 혹은 개인의 기대가 과한 것인지 선명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굉장히 어려운 난관에 봉착해 버리고 말았다.


자아실현에 대해서 '꿈'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꿈은 사회적 압력에 저항받으며 좌초되거나 혹은 극복하여 이룩되는 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단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꿈과 현실을 대치시키는 방향으로만 전개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원화되어 부딪히는 대치상황은 복잡한 논증을 거치기도 전에 곧바로 서로를 구속하는 '당위의 문제'로까지 다이빙해 버릴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꿈은 일종의 사회적 산물이자 환상이다. 그래서 꿈이라는 개인의 이상은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사회가 존재함으로 인해 꿈이라는 것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꿈의 직업’을 성취한 이들조차, 그 안에서 하기 싫은 일을 마주하고, 타인과의 충돌을 겪는다.


나는 영상에서 “일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삶이 다시 일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했다. 이 연속성 속에서 일과 삶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둘을 철저히 구분해보고 싶은 것이다. ‘일은 일대로’, ‘삶은 삶대로’ 깊이 있게 숙고될 수 있을 때, 이 둘은 보다 조화롭고 성숙한 방식으로 병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정복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은 풍부한 상호주관적인 세계의 고찰을 필요로 한다. 각자의 주관을 연결시키는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충돌하고 마는 모순을 품지만 이 점이 바로 일의 가치를 근거 짓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은 본질적으로 '갈등'인 것이며, 갈등을 통해서만 성숙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보편타당한 주관은 자유다. 그런 점에서 일을 통해 이룩하고 싶은 나의 꿈은 일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자유’란 일을 하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을 통해 성숙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격을 갖추고, 전문성을 인정받고, 시간을 유기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가능성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정당한 보상’이자 ‘자유’의 조건이다.


돈만 많이 번다고 해결되는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그럴 능력도 못된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다는 게 꼭 자유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자유의 의미를 한 차원 더 성숙한 의미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활동이 나에게는 바로 일이기 때문이다. 일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고 충돌하고 갈등하며 나는 나를 알아간다. 일이 아니었다면 감당하지 않았을 많은 일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렇다고 부족한 보상을 감내하기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로 그 역시 자유를 억압하는 일일테니 말이다.


역시,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방법을 궁구 하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 이런 문제는 이미 앞서 지적되었다. '취미'가 일로 변모될 때 겪는 딜레마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목격하지 않았는가. 나는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일'이 된다면,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일은 일로서의 구조와 책임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직업과 자아실현, 일과 취미, 현상과 당위의 역학관계를 우선 차치하려는 것이다. 일에 서든 삶에 서든 나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이나, 이것을 통째로 엮어서 사고하는 것을 그만두려 한다. 현상과 당위가 서로를 향해 비약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일을 통해 삶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도, 삶을 통해 일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도 일단 보류한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정복해야 할 원한관계가 아니다. 일은 일로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찾고, 삶은 삶으로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찾는다. 그 점을 사고하고 싶은 것이다.


최근 나는 기술사 자격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여 생긴 기회라 할 수 있겠다. 기술사라는 자격은 다른 활동(강의, 컨설팅, 평가, 자문, 감리 등)으로 확장될 수 있고, 그 확장은 더 큰 자율성과 선택지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섣부른 기대, 과분한 욕심일지 모른다. 다만 좋은 선택이란 결국 '현재보다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할 뿐이다.(그러는 편이 훨씬 더 자유로우니까) IT 거버넌스 전문가, 지금 당장에 그려놓은 미래는 그렇다.


일과 삶에 대한 사유가 이토록 멀리까지 이어질 줄 몰랐지만, 나의 미래에 대해 한 걸음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수확이었다. (물론 유튜브가 갑자기 100만이 된다면, 채널에 전념하게 될 수도 있다.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





refer.

[1] 맬런 S. 밀러, 가나지와 사토시,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

매거진의 이전글매거진을 쓰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