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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 Sep 10. 2019

죽기 전에 꼭 가야 한다는 이 곳

나의 보물섬, 플로레스 이야기

나에게 여행이란 서점에서 가이드북 두 권을 집어 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재작년 런던을 방문했을 땐 런던 가이드북 한 권과 유럽 여행 가이드북을 샀다. 유럽 여행 가이드북은 이미 두권이나 있었지만 가이드북은 최신 개정판이 아니라면 낭패를 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버스비를 내기 위해 동전을 딱 맞춰 준비하고 탔는데 알고 보니 올해부터 50펜스가 올라서 지갑을 다시 뒤적거려야 한다거나(게다가 나의 뒤로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 삼십 분이 걸려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갔더니 문을 닫은 허탈한 상황 같은 것들 말이다.


어쨌든 런던 일정을 짤 때에는 도시에 대해 세세하게 소개된 가이드북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근교나 인접 국가로 갈 때에는 유럽여행 가이드북을 참고하는 편이 더 좋았다. 부끄럽지만 에든버러가 스코틀랜드의 수도라는 것도 그때 알았고, 소설 해리포터 속에 등장하는 다이애건 앨리의 실제 모델이라는 요크 쉠블즈에 가볼 수 있었던 행운도 여기에 있었다. 요즘엔 구글맵이나 각종 여행 가이드 어플이 무척이나 잘 나와있지만 빳빳한 종이에 형광펜을 쳐가며 여행 경로를 정해 보는 그 설레는 시간 때문인지 여전히 나는 아날로그식 여행자로 남아있다. 여행 내내 배낭에 들어있던 가이드북에는 그 나라의 공기나 냄새 같은 것이 담겨있어서,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 때에는 책장에 꽂혀있는 가이드북들을 읽어보며 ‘이곳에선 이런 게 좋았었지’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여행을 간 기분이 든다.


그날도 어김없이 사누르 대형 마트 한편에 마련된 조그만 서점에서 느긋하게 책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한쪽 구석에서 먼지가 가득 쌓인 책을 발견하고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는데, 바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도네시아 여행 가이드북이었다. 이번 발리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발리 가이드북을 네 권이나 샀다. 내용이 비슷비슷할 것 같지만 출판사마다 편집 스타일이나 주요하게 다루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책은 맛집을, 어떤 책은 쇼핑을, 또 어떤 책은 액티비티를 잘 다루고 있어 취합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가이드북은 출발 전까지도 끝내 구하지 못해 내심 아쉬움이 남았던 참이었다. 사누르의 작은 책방에서 네 잎 클로버라도 찾은 것처럼, 적어도 4센티는 족히 넘어 보일 것 같은 이 두툼한 가이드북을 신나게 넘겨보다 발견한 문장들은 단박에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현존하는 최상위 포식자의 서식지’ 발리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플로레스(Flores) 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가이드북에서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한다는 강렬한 문장과 함께 플로레스를 ‘곧 크게 뜨게 될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책을 덮어 뒤표지를 보니 출판일은 2016년 7월, 작가의 촉이 맞았다면 지금쯤은 크게 뜨고 있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어쩐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강한 느낌에 읽던 책을 계산하고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테보톨(인도네시아의 국민음료로 각진 팩에 재스민차가 들어있다) 하나를 꺼내 들고는 해가 잘 드는 창가에 앉아 가이드북을 마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롬복이나 길리, 누사 렘봉안 같은 인도네시아 섬들의 이름과는 사뭇 다른 어감을 가진 이곳의 지명은 포르투갈어로 ‘꽃‘을 의미하며, 16세기에 포르투갈 무역상과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자라는 꽃나무를 보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 섬이 특별한 것은 ‘코모도’라고 불리는 대형 도마뱀의 주요 서식지라는 것, 플로레스가 코모도섬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몸길이 최대 3미터, 몸무게 160킬로, 한번 물리면 침 속에 있는 박테리아로 서서히 죽게 된다는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 어쩐지 속이 울렁거려 테보톨을 내려놓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찾아보았다. 몸집이 아주 커다래진 도마뱀 같기도 하고 공룡 같기도 한 코모도는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제임스 본드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들어갔던 카지노에서 악당들과 싸우게 되는데, 그에게 총을 겨누는 악당의 뒤로 코모도가 슬금슬금 기어 오더니 악당의 다리를 콱 물어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화면으로만 봐도 무서운 이 포식자를 눈 앞에서 본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지만, 결정적인 마지막 한 문장이 남아있었다.


‘멸종위기종인 코모도를 보호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2020년부터 코모도섬을 폐쇄할 것을 검토 중이다’


분홍빛의 고운 모래와 투명한 바다, 깊은 바닷속에서 춤추는 가오리 떼, 훼손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자연,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그곳은 나의 마지막 여행지인 꽃의 섬 플로레스였다. 누구라도 플로레스를 가본다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고 주장한 또 다른 누군가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질 것이다.



마지막 여정, 플로레스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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