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마지막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고 입덕은 종국엔 탈덕으로 귀결된다. 탈덕에 관한 글을 탈덕 후에 쓸까도 생각했지만 아직까진 요원한 일이기도 하고 탈덕 전에 미리 생각을 정리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이돌 덕질의 결말은 종교와 짝사랑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신실한 신도는 한 종교만을 섬기며 한눈팔지 않고 평생을 추종한다. 반면, 잘생긴 선배에게 가슴이 콩닥이던 아이는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이 서서히 잊거나, 또는 어느 순간 같은 반 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겨 환승을 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향하던 마음이 사라지거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짝사랑에서 흔하고 자연스럽다. 또한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감정이 정리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아이돌 탈덕에 있어서도 나는 이 결말이 베스트라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 없이 좋은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탈덕 사유 중 가장 흔한 것은 ‘병크’이다. ‘병신 크리티컬 critical’의 약자인 병크는 흔히 ‘병크 터졌다’는 말로 표현한다. ‘병크’는 길 잘 걷다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맞은 것과 같다. 돌을 던진 것은 셋 중 하나다. 소속사, 팬덤, 아이돌 본인.
아이돌이 소속된 회사에 대한 팬들의 감정은 상당히 적대적이다. 아이돌에 대한 지원과 관리를 잘한다고 칭찬받는 소속사는 본 적이 없다. 아이돌을 혹사시키고 ‘헤메코’(헤어, 메이크업, 의상 코디)는 엉망이고 앨범은 성의가 없고 단가 저렴한 굿즈를 비싸게 팔아먹고 악플러 고소도 제대로 못한다고 힐난한다.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욕을 먹는 레퍼토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능력도 안 되는 회사가 아이돌 하나 잘 물어서 등골 뽑아 먹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인 때는 그나마 물심양면으로 어떻게든 띄우려고 애쓰던 회사도 연차가 쌓이고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슬슬 장사 접을 궁리를 한다. 공백기가 점점 길어지고 활동 기간은 점점 짧아진다. 예능이나 콘텐츠 제작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떡밥이 씨가 마른다. 더군다나 아이돌에게는 계약 기간이라는 것이 있다. 팀으로 온전히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데뷔 후 5년 내지 7년 정도이다. 문제는 나의 입덕 시기이다. 내가 1년 차 때 입덕 할지, 아니면 4년 차부터 좋아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덕후에게 멤버의 탈퇴나 기약 없는 활동 중단, 최악의 경우 팀 해체는 그야말로 재난상황이다.
팬덤이 하나의 밈이 된 경우도 있다. K팝 시장은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솟구치는 팬덤을 통해 급성장했다. 종교적인 광기로 휩싸인 팬덤은 여러모로 사람을 질리게 한다. 안에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밖에서 봐도 그 모양새가 참 징글맞다. ‘악개’ 양성소이자 ‘정병’의 산실인 프듀는 가장 열성적이고 악랄한 팬덤으로 유명하다. ‘병맛 코드’와 ‘악마의 편집’에 능숙한 엠넷과 ‘한 처먹기’가 일상인 K팝 덕후가 극적으로 만난 프듀는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킨다. 의도적으로 던진 떡밥은 활화산 같은 화력으로 돌아왔고, 의도하지 않은 떡밥도 ‘궁예질’과 ‘뇌피셜’로 기어이 뭔가를 만들어내 기름을 들이부었다.
프듀에 발을 담그면 일분일초마다 단짠, 밀당, 냉탕과 열탕,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초적인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만들었다. 프듀에서 덕질을 잘못 배운 일부 덕후는 공포와 불안을 이용해 정치질을 일삼는다. ‘카더라’ 통신을 사실인양 마구잡이로 퍼트리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덕후에게 ‘싸불’을 일삼는다. 프엑 때 이 싸불을 견디다 못해 나의 ‘존잘님’ 몇몇이 결국 ‘계폭’하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무력감과 분노로 탈덕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은 아직까지도 상처로 남아 있다.
아이돌 본인이 일으킨 사건, 사고는 가장 악질이다. 사소하게는 연애, 결혼에서부터 치명적인 것으로는 학폭, 마약, 성 매매, 음주운전 등이 있다. 연애나 결혼은 병크가 아니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이돌과 팬덤의 특수한 관계를 생각하면 그렇게 단순치만은 않다. 특히 팬덤을 통해 성장하고 보호받은 남돌의 경우 연애와 결혼은 병크가 될 수 있다.
남돌이 덕후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그저 감사 인사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된다. 이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다. 너와 내가 만든 이 세계에 누구도 침범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이다. 덕후도 남돌이 몰래 연애하는 거 다 알고 언젠가 결혼도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젓이 아이돌로 활동하면서 연애하는 티를 내거나 기사로 공식화하고 급기야 결혼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한마디로 상도의에 어긋난다. 사생활 보호라는 명목으로 덕후를 비난하기 전에 이 구도에서 과연 누가 약자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아이돌도 사람’이라고 외치려면 비뚤어진 아이돌 산업과 이를 악용하는 소속사를 향해야지, 최소한 팬싸에 온 덕후에게 할 말은 아니다. 범죄 행위, 특히 성범죄는 말할 가치도 없다. 당연히 팬덤 장사를 접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 이건만, 기어이 컴백하는 남돌이 심심치 않게 있다. 결국 팬들이 사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비열하다.
‘병크의 3요소’는 종종 연쇄 작용하기도 한다. 아이돌의 병크 때문에 팬덤이 편을 갈라 피 터지게 싸우다가 소속사의 미숙한 대처에 분노하며 탈덕의 수순을 밞는다. 가끔 ‘현타’ 때문에 탈덕하는 걸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덕질을 하며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은 잠시 쉬어가는 타임일 뿐이다. 제 아무리 ‘덕생’을 방해하는 ‘혐생’일지라도 사회 활동을 하고 돈을 벌어야 또 덕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탈덕이 어떤 형태가 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일단 최애 본인의 병크는 확률이 가장 희박하다. 최애는, 빅톤의 한승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이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의 셀링포인트와 덕후의 니즈를 정확히 간파하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맞춰 나갔다. 데뷔한 지 4년이 넘었는데 본업 잘하고, 외모 관리 철저하고, 팬서비스 좋은 남돌은 흔치 않다. 본인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그렇다는 건 정말이지 드문 일이다. 팬덤의 병크 같은 경우 분탕질 사건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빠르게 수습되었다. 팬덤의 규모가 크지 않다는 건, 분탕질하는 절대적인 수가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대한 팬덤이 있던 프엑 때에 비하면 아주 순한 맛이다. 걱정되는 건 소속사의 병크인데, 아직까지 그 징후를 발견한 적은 없다.
어떤 결말이든 부디 상처 받지 않는 끝맺음이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이 그리 큰 욕심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