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 인물들 그림으로 남아 있어. 화타, 관우 등 난세의 영웅 치료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고 부르는 소설은 <삼국지연의>이다. <삼국지>는 중국 위· 촉·오 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서로, 진나라의 학자 진수(233∼297)가 기록했다. 반면 삼국지연의는 훨씬 후대인 명나라 시대의 나관중이 편찬한 역사소설로, 원 제목은 <삼국지통속연의>이다.
▲ 삼국지도 10폭 병풍 비단에 채색, 115.3 x 40.0cm, 전체 143.0 x 445.0cm ⓒ 국립중앙박물관
위 사진은 삼국지연의를 주제로 한 10폭 병풍의 일부이다.
<삼국지연의도>라고 부르는 이러한 그림은 조선시대에 유입되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당시 소설 삼국지연의가 한글로 번역되어 아이와 여성들도 읽었으며, 책에는 삽화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 <삼국지연의도> 역시 유행하였다.
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 중에 특정 장면을 그림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취향을 고려하여 화가가 선택했을 것이다.
위 병풍은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많다. 오른쪽은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며, 왼쪽은 삼고초려를 담았다.
삼고초려는 '오두막을 세 번이나 돌아보다'는 뜻으로, 유비가 뛰어난 인재인 제갈량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한 데서 유래했다.
삼고초려는 특히 인기 있는 화제로, 이 부분만을 단독으로 그린 것도 많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으로는 겸재 정선의 <초당춘수도>, 조석진의 <삼고초려도> 등이 있다. 초당춘수는 제갈량이 읊은 시에도 나오는 문구로, 초당은 제갈량이 살던 초가집이고 춘수는 봄날의 잠이라는 뜻이다. <초당춘수도>는 유비가 방문했을 때 낮잠을 자고 있던 제갈량과, 관우와 장비의 불평에도 제갈량이 스스로 잠을 깰 때까지 기다렸던 유비를 그린 그림이다.
이 밖에도 위의 10폭 병풍에는 봉의정에서 여포가 초선을 희롱하는 장면, 사마휘가 명사를 다시 천거하는 장면, 조조가 술을 데우며 영웅을 논하는 장면, 유비가 한중왕 자리에 오르는 장면 그리고 관우가 다섯 관문을 지나며 장수들을 베는 장면 등이 있다.
▲ 관우천리행도 이도영, 비단에 채색, 36 x 114 cm ⓒ 공유마당(CC BY)
이도영(1884~1933)의 <관우천리행도>이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 천리를 가는 천리행(千里行)을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섯 관을 지나고 여섯 장수를 베었다' 하여 오관참장이라고도 한다. 오관참장 장면은 위의 삼국지연의도 10폭 병풍 중에도 속해있다.
조조는 위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여러 분야에서 재능이 뛰어났다. 그에 대해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혹은 간사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조조는 관우와 적이었지만 인간적으로 아끼고 곁에 두고 싶어 했고, 그러한 조조의 옆에 머물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관우는 유비에 대한 충절로 먼 길을 떠난다.
이처럼 관우는 그 용맹함과 충의로 유명하다. 그래서 중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숭배되었고,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 곳곳에 관왕묘가 세워지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는 정식 명칭이 '동관왕묘'인데, 1601년(선조 34)에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목적으로 지어진 사당이다.
관우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화타와 관련된 것이 있다. 위나라 군대와 전쟁 중 관우는 팔에 독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한다. 그의 상처를 본 화타는 독이 뼛속까지 퍼져 수술을 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칼로 살을 째고 뼛속의 독을 긁어내는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화타는 관우의 팔을 묶어 고정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관우는 태연히 바둑을 두며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화타(145~208)는 중국의 전설적인 의사로, 외과학의 창시자로도 꼽힌다. 화타는 마비산이라는 마취약을 사용해서 수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비산을 구성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약재는 대마, 만다라화(흰독말풀), 초오, 백지, 천남성 등 몇 가지가 있다. 대마는 마취와 환각 작용이 있는 마약의 일종인 대마초(마리화나)로 더 유명하다. 만다라화, 초오, 천남성은 독성이 있는 약재이다. 백지는 항균, 진통 작용을 가진다.
화타의 죽음에 조조가 연관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조는 두통으로 고통스러워했는데 화타는 이를 고치려면, 마비산으로 마취한 뒤 머리를 쪼개 뇌수술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자신을 암살하려는 것으로 의심한 조조는 화타를 죽였다. 화타의 죽음 이후 조조의 아들은 중병에 걸렸는데, 온갖 명의가 치료했지만 결국 낫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그제야 조조는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이천년 전에도 마취제를 개발하여 수술을 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대상이 우리가 잘 아는 난세의 영웅들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한의사와 함께 떠나는 옛그림 여행'에 연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