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갑자기 히말라야 산악인 중시바의 화신이라고 칭송받았지만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없었던 세르파 텐장 노르가이를 떠올렸다.약사 선생의 시행착오가 과거에 몇 번이 됐었든 간에 자신과의 협력이 약사 선생 최고의 성공담이 되기를 빌었다.
그날 K는 약사 선생에게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아 간단한 작별 인사를 전하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라디오에서는 어느덧 어두운 밤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맞는 차분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초저녁 흥겨운 멘트와 경쾌한 음악이 흐를 때 불편했던 마음이 그나마 안정되었는지 만성적으로 손을 적시던 땀이 그리 심하지 않아 운전하기가 한결 수월한 듯했다. K는 하루가 모처럼 길었었는지 돌아가는 길에서부터 조금씩 잠을 청했다.
'이대로 내일 아침이 되었으면...'
간밤에잠이 충분치 못했던 K는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지역에서 소규모 학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사계획에 참석대상의 프로필을 상세히 기재해 공식 결재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했다.
K는 어젯밤 이사장 대행의 프로필이 베일에 싸여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껏 경험으로는 고위인사의 뒷배경을 알아내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K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사장 대행의 프로필은 비워놓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어젯밤 해가 지는 저녁녘 나눴던 이야기로 약사 선생에게 억지로 받아낸 의약품선정위원회 당해연도 전체 위원들의 약력들이 적힌 팩스 서류들을 살펴보다가 몇몇을 추려내어 K의 책상 위에 올렸다. 사실 사무실 안에 배치된 책상은 많았지만 비서 외에는 사무실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개인적인 업무공간의 구분이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서류에는 의선위 위원들의 간단한 약력과 함께 병동 위치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K는 약사 선생이 개인적으로친하다고 이야기했던 후임 약사의 서류를 잠시 훑어보고는 지난 식사 자리에서 눈썹이 짙었던 30대 후반의 여약사가 약사 선생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얼핏 기억났다. 차분한 분위기 외에는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고 느낀 K는 다른 위원들의 서류들도 한 장 한 장 빠짐없이 읽었다.
K는 서류들 중 몇몇 인원들의 서류들에는 특히 오타가 많은 것을 보고 서류가 직접 작성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약사 선생이 추천한 여약사의 서류에는토시 하나 틀린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반면, 소아과 병동의 부교수한 명은 다른 사람이 받아 썼다라면 훨씬 좋았을 만큼 어휘의 선택이나 맞춤법이 봐줄 수 없을 정도였다.
문서에 인간적인 면이 많이 드러나서였을까? K는 부교수쯤 됐고 의사 출신이고 의선위 상임위원이기도 한 소아과 부교수가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아, 약사 선생이 권했던 여약사를 만나기 전에 소아과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소아과 부교수가 주로 근무하는 병동 위치와 전화번호를 스마트폰카메라로 간단히 촬영해 개인업무용 저장공간에 업로드하고서 자동차 키를 챙겼다.
영업직 경력으로 치자면 꽤나 잔뼈가 굵다고 자부해왔던 K였지만 의약품 쪽으로 이직한 이후 약간은 폐쇄적이고 그다지 필요치 않은 전문성이라는 잣대로 제안을 위한 논의 기회에서조차 배제되는 업계 분위기로 K도 조금은 의기소침해진 터라 사무실을 나서는 발걸음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의 무게가 실려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