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근처의 카페는 넓은 공간에 보통 한적한 편이라 무언가에 집중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렇다고 근처에 주택단지가 빽빽하게 조성되었다거나 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공부를 위해 카페를 찾는 학생들보다는 오히려 병원 관계자가 시간이 한가할 때 직장 동료들의 눈을 피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종종 활용되고 있었다. K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지난 식사 모임에서 얼굴을 익힌 의약품심의위원회 관계자라도 있을까 주변의 사람들을 휙 한 번 둘러보고 이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곧 혼자만의 휴식을 취하려는 듯 태세를 바꿔버렸다.
오랜 영업직 생활로 휴식을 취할 때도 K는 노트를 꺼내놓고 영업 활동을 해야 할 주요 인물들의 관계도를 끄적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어김없이 의약품심의위 간사인 약사 선생을 중심으로 오늘 만난 부교수, 그리고 옆에는 조그맣게 소아과 병동에서 만났던 간호사와 랩실에서 인사를 나눴던 레지던트의 이름을 흘려 썼다. 그리고는 부교수를 기다릴 때 레지던트가 들려주었던 뜬소문을 떠올리며 병원 의료진 중에 숨어있는 재단가의 자녀와 친분이 있다면 병원 영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외딴곳에 위치했어도 수십 년째 성업 중인 병원의 재단은 한해 수백억 가까운 지역경제 유발효과를 끼치고 있어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했고, 수익의 15% 이상을 인근 지역사회에 기부하고 있었는데 의료계에서 그만큼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는 재단가의 철학이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병원 측은 재단 이사회 구성원들을 매년 공시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사진들의 가족이나 사돈의 팔촌이 누구인지 알려야 하는 규정은 없었기에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K가 노트 위에서 해볼 수 있는 거라고는 지금까지 만났던 병원 관계자들을 손이 이끄는 대로 써 내려가는 자기 위안적 행위일 뿐이었다. 첨탑 끝도 보이지 않는 거성에 가로막혀 어디라도 두드려보기라도 해야 답답함이 풀릴 듯이. 끝내 답은 나올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K는 노트는 어지럽다 못해 까맣게 채워지고 있었다. K도 스스로가 생산적이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단가의 자녀.'
K는 정말 의식이 흐르는 대로 펜을 움직이며 노트 위에 스스로의 질문을 적었다. 재단가의 자녀. 재단가의 자녀. 이야기는 그럴듯했지만 실체가 없는 궁금증이 순간 덧없게 느껴지자 K는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수트 안주머니 담뱃갑을 짚어보니 힘없이 구겨저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에휴. K는 마시던 커피를 남겨두고 그대로 남겨두고 퇴근 후에 먹을 안주거리와 담배를 사기 위해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고르면서 생각이 좀 섞이니 담배 욕구가 조금 줄어 K는 담배를 사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보통 숙소에서 한잔 할 때면 담배가 너무나 간절해지는터라 상비용이라도 챙겨두자는 생각으로 한 갑 집어 들었다. 값을 치르고 물건들이 두둑한 걸 보니 오늘 내내 공허했던 마음에 약간의 위로가 되는 듯했다. 이대로 퇴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카페에 두고 노트를 생각하고는 돌아가는 길에 잘 됐구나 싶어 담배 한 개비 빼어 물었다.
"위이잉~ 위이잉~"
스마트폰 SMS 알람. 파견 이후 특별히 SMS를 받을 일이 흔치 않았던 K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메시지겠거니 하고 카페에 가서 보기로 했다. 개인적인 메시지는 보통 미리 만들어진 톡방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에 지인들 연락은 아닐 것이고, K가 이 지역으로 파견 온지도 얼마 안 되어 긴급히 연락 올 일도 없을 터라 십중팔구는 스팸성 광고 메시지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이 붙은 담배는 오랜만에 K의 가슴을 뛰게 했고 K는 그 느낌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K는 옷에 잔뜩 밴 담배 연기를 떨어 버리느라 한참을 유난을 떨다가 카페에 노트를 찾으러 들어가기까지 거의 1시간이 걸렸다. 병원도 퇴근시간이라 그랬는지 카페를 찾은 사람들이 많아 조금은 북적거릴 정도가 되었다. K는 노트를 챙기려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가 스마트폰을 켰다. K는 발신자 번호를 슬쩍 살폈지만 번호는 익숙하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
'모바일인데 누구지? 어...? 내 노트'
SMS 메시지에는 K가 영업을 위해 방금 전에 그려놓은 병원 관계자 연관도를 촬영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건조하다 못해 관련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듯한 말투로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재단 관계자가 무엇 때문에 궁금할까요?
의약품은 재단 결정사항과는 전혀 관계없어요.'
K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K의 노트를 찍은 게 분명했지만 누가 찍었는지 주인 몰래 사진을 찍은 사람이 아직 카페에 남아있는지 K가 알 방법이 전혀 없었다. 분실한 물건도 없었고 협박 정황도 없었기 때문에 경찰 조사를 핑계로 cctv를 돌려볼 수도 없었다. 또, 때 마침 주문이 느는 시간대에 한창 분주해진 카페 직원을 붙들고 K의 자리에 누군가 다녀간 적이 없는지 물으니 자신은 너무 바빠서 테이블 소지품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터라 미안하게 됐다는 친절했지만 형식적인 사과를 들은 게 전부였다.
K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천천히 둘러보았다. K와 우연히 눈길이 마주친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내 별일 아닌 듯 외면했고 K는 카페 안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장난 같은 메시지를 자신에게 보냈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을 것 같아 테이블 위의 짐들을 챙겨 마치 도망치 듯 카페를 나왔다.
병원 주차장으로 뛰다시피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노트에 적었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메시지의 첨부 사진에는 K가 그동안 만났던 병원 관계자들이 누군지, 그리고 서로 어떤 관계일지 확인이 되었든 안되었든 사실 여부를 떠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불쾌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었다. 병원에 괜한 소문이 돌아서 영업에 방해라도 되면 어쩌나 해서 스스로의 부주의가 원망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