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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Oct 24. 2020

스물여덟 살 맞후임이 들어왔다

진성쓰 이야기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이제는 전 국민 떼창도 가능해진 '내 나이가 어때서'를 듣다 보면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나이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무언가를 하기에 나이가 너무 적어서 혹은 많아서 못한다면 얼마나 서러울까. 딱 좋은 때, 적절한 시기라는 표현은 언뜻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적정 범위 밖 사람들을 배제하는 냉혹한 선 긋기이기도 하다.


입대하기 딱 좋은 때를 찾아서

0교시와 야자로 고통받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유로운 대학 생활이 펼쳐지나 싶었다.

자유에는 철저한 준비와 순발력이 필요할 줄 누가 알았을까. 뒤늦게 깨달았을 땐 이미 수강신청은 실패로 끝나 있었고, 1교시로 도배된 첫 학기를 받아들여야 했다. 9시 수업이 원래 이렇게 힘들었던가. 내가 짠 시간표니 어디다 불평도 못하겠고 참을 수밖에. 그래도 고등학생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호사를 누렸다. 대학생의 특권인 공강은 없었지만 오전 수업만 있는 날에는 열두 시 땡치면 집에 갔으니까.


수업, 강의실, 동아리, 사람 등 새로운 모든 것에 적응하느라 새내기 시절이 끝난 줄도 몰랐다. 그리고 날아온 병무청 신체검사 통지서.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1학년 과정만 마치고 내년 초에 입대할 것인가, 2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내년 말에 입대할 것인가. 주(酒)류 사회가 부담스러워 아싸(아웃사이더)의 길을 택했던 터라 전자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행동력이 부족한 나 같은 타입에게 21살 입대는 너무나도 매혹적인 선택지였다. '그래. 마음의 준비도 할 겸 한 학기만 더 다니고 가자.'


돌이켜보면 잘 한 선택이었다. 어쿠스틱 밴드 동아리 소개를 핑계로 새내기 때도 안 갔던 신입생 오티에 졸졸 따라가 무대에 섰고, 나중에는 후배와 그룹을 이뤄 대학 축제의 뒤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교양수업에서 지금은 기자가 된 친구를 만나 동대문 쪽방촌 벽화 그리기 프로젝트에 참가한 건 잊을 수 없는 대학시절의 무모한 도전 중 하나가 됐다. 학기가 끝나고 맞이한 방학에는 일복까지 따라와 입대 한 달 전까지 공공기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광도 얻었다.


우리들만의 대학 축제 공연(오른쪽이 접니다.), 동대문 쪽방촌 벽화 그리기의 산물


그해 10월, 나는 예정대로 스물한 살에 입대했다. 통계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체감상 대학생들의 평균 입대 나이에 맞춰 들어간 셈이었다. (논산에서 만난 훈련소 동기들도 대부분 20~22살이었다.) 그래서 이번 글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좀 늦으면 어때'라고 말하기엔 '딱 좋은 때'를 의식하고 들어갔기에.


군대는 빨리 갈수록 좋다는 말

군필자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말이 있다. 군대는 빨리 갈수록 좋다. 되도록 빨리 가라. 정말 그럴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들어온 시기와 계급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군대에서는 '사회 나이'가 힘을 잃는다. 그래서 훈련소에서는 동기들 간에 '형'이라는 호칭도 붙이지 못하게 했다.(어차피 친해지면 암암리에 다 하지만.) 한 살 차이만 나도 쉽게 친구 먹지 못하고 형, 동생을 나누는 한국 사회에서 군대의 계급 문화는 아이러니다.


나도 입대를 일찍 한 편은 아니었기에, 빨리 갔을 때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온 친구들도 많기 때문이다.) 더 어린 나이에 전역할 수 있다는 점? 인생의 숙제를 일찍 끝냈다는 점? 등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21개월(지금은 18개월) 복무는 다 똑같지 않은가. 반대로 늦게 가면 안 좋은 점을 생각해 봤다. 이건 확실히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어린 선임(혹은 동갑 선임)한테 대들지도 못하고 존대해야 하는 것. 밖에서라면 말도 안 붙여봤을 이노무스키에게 억지로 대답하고 맞춰주는데 굴욕감마저 들었다. 나와 안 맞는 선임은 나이에 관계없이 싫었지만 그게 내 또래 거나 어린 동생이라면 반발심이 배가 됐다.


그래도 갈 사람은 간다고, 시간이 지나니 싫었던 선임도 좋았던 선임도 하나 둘 전역해 부대를 떠났다. 이젠 나도 선임보다 후임이 많은 위치가 됐고 기다리던 맞후임을 만났다. 인사과에서 근무했던 터라 누구보다 일찍 맞후임을 맞았다.

'어... 어라?'

앳되고 어딘가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상상 속의 맞후임 이미지가 아니었다.

어깨는 나보다 두 배는 넓어서 듬직하고, 키도 크고, 얼굴엔 긴장감이라고는 1도 없는, 큰 형님 분위기가 풀풀 났다.

함부로 '너'라는 호칭을 부르면 안 될 것 같아 말도 못 걸고 지켜만 봤다.


"이병 우진성! 잘 부탁드립니다."


군대는 빨리 갈수록 좋다는 편견을 깬 첫 등장이었다.


우리 진성쓰는요

SKY 법학과 졸업.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28살에 입대.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자세와 동기를 사로잡은 탁월한 리더십.


더 많은 내용을 적어보고 싶었으나 생각보다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반성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토록 관심이 없었다니. 철책과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부대 안에서 난 마음의 여유를 잃었던 걸까.


건장한 풍채에 흠칫하고, 나이에 놀라고, 화려한 스펙에 입이 벌어졌다.

'아니, 도대체 왜. 어쩌다 여기에 지금..'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꾹 참았다. 성급하게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함부로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선임들에게 깍듯했고, 마치 입대가 처음이 아닌 듯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부대 생활에 온전히 녹아들었다. 인사과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해 사무실 안쪽에서 누구보다 간부 같은 모습을 하고 일에 열중했다. 인사과에 처음 온 신병들은 종종 그를 향해 "충성!"을 외쳤을 정도였으니.


늦었다고 생각되는 나이에 입대했지만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일이면 일, 운동이면 운동, 부대원들과의 관계까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행정실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으면 뭔가 든든했다. 진성쓰가 오고 내 생활도 안정감을 찾았다. 근데 이름을 왜 그렇게 부르냐고? 보통 후임한테는 이름만 붙여서 "진성아"라고 부르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모습과 행동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가 학습된 군대 문화마저 흔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지만 너무 무례하지 않게, 친근함을 담아 "진성쓰"라고 불렀다. 그 뒤로 인사과 내 맞후임의 호칭은 '진성쓰'가 됐다. 최초 사용자로서 아주 뿌듯한 전파였다.


진성쓰라는 사람에게 감동하고, 정말 미안했던 일화가 있다. 전역 전 마지막 혹한기 훈련이었다. 당일의 진지 이동을 끝내고 모두 피곤에 절어있던 한밤중, 막사 주위 경계를 서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텐트 안에서는 나와 진성쓰를 포함한 분대원 열댓 명이 핫팩에 의지해 몸을 녹이고 있었다. 순서를 어떻게 정할까 고민하려는데 진성쓰는 우직한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나섰다. 그때 잡았어야 했다. '한 시간 정도 뒤에 바꿔주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였다.


가만히 있어도 찬바람이 쌩쌩 불던 그 날, 진성쓰는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까지 같은 자리를 쭉 지켰다. 누구와도 교대하지 못하고. 난로와 핫팩이 주는 온기와 함께 난 엎드려 잠이 들었고, 교대해주는 걸 깜빡 잊고 말았다. 다섯 시간이 넘는 근무를 마치고 텐트 안으로 들어온 진성쓰의 얼굴은 창백했다. 혼자서 계속 나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왜 그랬어. 교대하자고 하지.'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진성쓰는 담담하게 '그걸 어떻게 말합니까.'라고 답할 뿐이었다.(이때는 정말 화난 것 같아 보여 무서웠다. 그리고 정말로 미안했다. 그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더욱.)


그랬다. 일단 경계 근무에 들어가면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일이다. 텐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임시 근무표를 만들어 교대가 이뤄지게끔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한 몸 편의를 지켜보자고 불편한 의무를 부과하기 싫었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진성쓰는 앞장서서 의무를 받아들이고 기약 없는 근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충분히 화를 낼 법도 한데, 표정이 굳어졌을 뿐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않았다.

나는 진성쓰를 존경하게 됐다.


제대 그 이후

전역 후 몇 번 진성이 형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단 둘이서는 아니고 부대원들과 같이. 둘 다 전역해서 민간인이 됐음에도 그는 날 여전히 '박 병장님'이라고 부른다. 이제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도 그런다. 한편 나는 제대와 동시에 '진성이 형'이라고 호칭을 바꿨지만, '~요'라는 존댓말을 쓰는데 어색함을 느낀다. 반말은 더 못하겠다. 부대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왔던 게 말이다.


몇 년 전,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끝으로 진성이 형의 근황을 듣지 못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할 것이기에 걱정은 안 한다. 그래도 이왕 공부한 거 법조인의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잘 되기를 바란다. 잘 돼야만 하는 사람이다. 당당하게 활짝 핀 그의 미소를 보고 싶다.


과거의 그를 통해 현재의 나는 큰 위로를 받는다.

빨리 가는 게 조금 편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늦게 가는 게 불편해지는 건 아니다. 상대적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멀리 치워버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절실함과 깊이 있는 경험이 더 큰 울림을 남기더라.




p.s 예정일(목)보다 무려 이틀이나 늦게 글을 발행하게 된 점 죄송합니다. '좀 늦으면 어때'라고 해서 발행일이 늦어지는 건 결코 아닙니다. (자신과의 약속이라도) 약속 시간에 늦으면 실례이니까요. 최근 생활 패턴이 바뀌어서 글 쓰는 시간이 줄어들었는데, 지각이 반복된다면 발행일 조정도 고려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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