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못한 전언, 혼자만 남은 답가
최근에는 아침에 바깥을 나설 때마다 반가운 비의 향기가 풍겨온다. 바람을 타고 오건, 눈에서 녹아 내리건 꽃잎을 몇 개피 떨구건 간에 나에게 비란 참으로 반가운 존재이다. 어딘지 모를 서글픔이 스민 그 향기는 맡고 있자면 주변 정경에 운치를 더해주곤 한다. 특히 한밤중에 내리는 봄비란 무척 귀하다. 겨울의 서늘함과 봄의 상냥한 기운이 이 봄비에 가득 녹아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애상적인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봄비를 보면 늘 떠오르는 두 곡이 있다. 두 곡은 다른 곡이지만, 같은 곡이기도 하다.
평소 즐겨보던 주성치 영화 중에서도 단연 기억에 남는 곡을 고르라 한다면 아마 그토록 유명한 서유쌍기 - 선리기연의 일생소애(一生所爱)나 파괴지왕의 테마곡보다도 007-북경특급에서 008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른 이향란(李香蘭)을 말하고 싶다.
장학우가 주성치의 톤에 맞춰 키를 낮추고 부른 애절한 사운드와 가사는 영화 내에서 그리 오래 들리지 않았음에도 내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자신을 암살하려는 여성 스파이에게 추근대고 신분을 숨기느라 피아노 연주를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정마저도 모두 날려버릴 만큼 그 노래는 한동안 내 뇌리를 잠식했다. 다행히 인터넷 덕에 이 노래의 제목과 가수를 찾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당시 다음카페였던 '주성치전영공작실'에서 알음알음 그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최근 이 제목에 얽힌 인물과 원곡이 있다는 사실에 꽤 놀랐다. 하나의 온전한 곡에는 그 멜로디를 차용할 수려한 원곡과, 애절한 가사를 떠올리게 할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먼저 이 멜로디를 지닌 원곡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향란의 애절함과는 또 다른 느낌을 심어주는, 타마키 코지(玉置浩二)의 '가지 말아줘(行かないで)이다.
https://youtu.be/MK7pw-xbUEM?si=ikqgrM52I32hbeAH
가사를 살펴보면 화자는 상대에 대한 애절함을 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보다는 도리어 스스로를 나무라며 체념하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상대와의 즐거운 시간은 이미 모두 흘러간 뒤이며,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을 뿐 상대의 모든 것은 이미 차가운 이별을 말하고 있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겨우 삼키듯 견뎌내면서도 결국 후렴구에서는 처절할만큼 떠나가는 상대에게 가지 말아달라 애원한다. 노래의 내용 속에는 모두 화자 스스로가 느끼는 추억, 회한, 자책으로 가득 차 있어 일후에는 쓰라린 이별 밖에는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위의 곡은 중국 드라마 <굿바이 이향란>의 테마곡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두 번째 요소인 이향란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 여전히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山口 淑子)보다 유명한 이름일 것이다. 그녀는 어릴 적 부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일제 선전영화에 종종 출연하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중국 전역에 이향란이라는 이름을 떨치던 가수이자 배우였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뒤에는 중화민국에 기소되어 군사재판까지 받았으며 결정적으로 무죄를 받았으나 법정에서 그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뒤 사죄하였고,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지속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제법 낯설겠지만 등려군이 불러 유명해진 '야래향(夜來香)'과 '하일군재래(何日君再來)'의 원곡자 또한 그녀이며, 결국 위 노래를 따다 만들어진 곡 또한 지금까지도 색을 바라지 않은 채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그녀의 이름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하기 그지 없는데, 늘상 이 점이 헷갈리게 된다. 과연 이것은 난꽃 향기를 내는 배꽃인가, 아니면 배꽃 향기를 내는 난꽃이란 말인가? 물론 그녀의 성씨로 오얏이李자가 쓰인 것은 알겠지만 그대로 두고 본다면 어느 방향으로 해석해도 결국 '그 실체와 다른 모습을 한 것'을 뜻하게 되며 이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의 일면과도 상당부분 닮아있다.
장학우의 이향란을 먼저 언급했음에도 내가 타마키 코지의 원곡을 먼저 올려두었던 것은, 바로 이향란의 가사 내용이 마치 타마키 코지의 '가지 말아줘'에 대한 오랜 시간 뒤의 답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너져가는 화자를 그대로 두고 떠나갔던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장학우의 '이향란'에서 그 면모를 조금 들여다볼 수 있다.
https://youtu.be/E3GLIu4BLzc?si=OcLFGSB3mdyuYo0x
봄비에는 겨울의 서늘함과 봄의 상냥함이 모두 깃들어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봄비란 그 어느 계절에도 분명히 속하지 못한다. 한낮의 꽃피는 따스함도 가질 수 없으며, 눈이 소복히 쌓이는 추위도 가질 수 없다.
그렇기에 온전히 붉어질 수 없는 꽃처럼, 온전히 얼어붙을 수 없는 얼음처럼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한 채 회한의 고리 속에서 영원한 봄비를 맞으며 그리움에 사무치고 마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그토록 차갑게 내친 그 사람은 대답을 해줄 수가 없다. 찾아갈 수도, 부를 수도 없다.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는 이렇게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후회의 꿈속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에 맞춰 시간은 멈춰버린다. 영원히 이어지는 밤. 영원히 내리기만 하는 봄비 속에서 손에 쥔 사진만이 선명할 뿐이다.
늘 그렇듯 뒤늦은 사랑의 후회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처연한 구석이 있다. 떠나가는 상대를 바라보며 눈물짓는 사랑에도, 그 뒤늦은 사랑을 후회와 함께 보내며 시간을 멈춰버린 회한의 끝에도 감미롭게 맴도는 씁쓸함은 늘 가사와 맥락 사이를 헤집어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금요일의 늦은 오후. 오전 내내 내리던 봄비가 수그러들고 이제는 그 봄비가 남긴 자취만이 남아 주변 정경을 물들이고 있다. 떠나간 겨울을 그리워하듯이, 다가올 봄을 기다리듯이 지금 이 순간에 잠시 멈춰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들을 몹시도 그리워해본다. 비는 늘상 꽃잎을 떨구지만 그 꽃잎들이 모두 같지는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