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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Feb 07. 2023

종이를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린다면

삶과 용기에 관하여

나는 그림을 잘 모르지만, 그림을 배운 적이 있다. 어릴 적 미술 학원을 십 년 가까이 다녔지만, 거기에서는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친한 동생이 카페에서 갑자기, 예민하고 자유로운 언니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연필과 도화지를 꺼내더니 자신의 얼굴을 그려보라 한 것이다.

자신이 재미있는 것을 알려 주겠다며, '종이를 보지 않은 채' 대상을 그려 보라고 했다. 마치 '개미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가듯 대상의 윤곽선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손에만 집중하면서 종이에 천천히 대상을 그려낸다.

아무래도 종이를 너무나 보고 싶어 지기 때문에 그 마음을 참는 과정이 필요했다. '어떻게 그려질지' 보다 '내 감각'에만 집중해서 그리는 건 백지에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두렵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선이 내 손을 끌고 가는 것처럼, 마치 종이 위가 아니라 공중에서 손을 움직이게 되는 듯한 자유로운 느낌이 있다. 그렇게 선이 끝나면 종이 위에 그림이 완성되어 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내 시선의 움직임을 선물 받았다는 느낌 같은 게 있었다. 그림을 모르는 나에게도, 그건 매우 흥미로운 방식이 되었다. 동생은 박수를 짝짝 치면서, 역시 언니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며, 앞으로도 그림을 꼭 그리라고 했다.

글을 쓰는 과정도 비슷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을 살 때에는 글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렇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삶을 살면서 글 생각을 하는 걸 좀 괴로워하는 편이다.

그것은 삶에 집중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림으로 치면 자꾸 종이를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물론 종이를 최대한 많이 보고 대상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려졌는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판단하는 그림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방식과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는 삶을 살 때는 삶을 살고 싶다. 다르게 말하면, 글을 쓸 때에는 글만 쓰고 싶다.

삶을 살 때에는 삶만 살더라도 자연스레 모아지는 에너지가 있다. 아직 언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발휘될 수 있는, 글이 되기 이전의 상태. 꼭 그 상태인 감각을 내버려 두고 글자가 백지를 밀고 나가는 힘에 집중하면 내 감각에 맞게, 글이 써진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룩북이나 유행에 따라 입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색깔과 촉감의 옷을 입는 것처럼. 처음부터 어떤 옷을 입을지 미리 정해놓지 않아도, 제일 입고 싶은 모양의 티셔츠만 하나 찾으면 바지나 코트를 맞춰 입는 것은 쉬운 이치처럼 말이다.

나만의 시선과 언어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무 많이, 미리 고민하지 않고 삶에 집중한 뒤 그 모든 것을 등지고 종이 위에 앉고 싶다. 몇 년 전 그 동생의 말을 믿는다. 내 시선이나 내 표현법에 대해서 너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가 내 주머니에 알사탕처럼 들어 있다. 나는 그걸 꺼내 먹으면서 글 한 편을 뚝딱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림에서 발견한 내 시선에 대한 믿음은, 다른 영역에서도 유효해진다. 그림이든, 글이든, 삶이든 시선을 믿고 펼쳐 낸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할 것 같다. 나는 나이가 많거나,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이 많거나, 뭐든 잘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가끔 해월이가 부순 장난감을 고친다거나, 책장에 페인트칠을 한다거나, 때와 장소에 맞춰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을 때 나도 모르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 문득 육 년 전 그림을 배웠던 순간을 말하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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