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흔들려야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내진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진이 발생해도 '흔들리지 않게' 설계하는 게 아니라 '잘 흔들리게' 설계하는 것이다. 유연함, 그 '연성'이 바로 내진설계의 핵심이다.
작은 규모의 지진에서는 구조 부재와 비구조 부재가 손상받지 않아야 하고, 중간 규모의 경우에는 비구조 부재의 손상은 허용하지만 구조 부재는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 대규모 지진에서는 구조 부재와 비구조 부재의 손상을 허용하지만, 구조물 붕괴로 인한 인명 손상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예상되는 모든 피해를 예측한 완벽한 내진설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인생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모든 변수를 예측해 인생을 계획하는 건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영화 기생충에서처럼 '다 계획이 있다'고 해도,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처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단계적으로 전략을 짜고, 실행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점검하는 게 필요하다.
기준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두는 건 내진설계 시 기둥을 세워두는 것과 같다. 기준이 필요한 이유는 쉽게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다. 견고한 기둥이 버티고 있는 건물이 튼튼한 것처럼, 나는 나를 견고히 하기 위한 나만의 기준을 찬찬히 세우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인생을 위한 내진설계.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항상 경쟁, 경쟁, 경쟁의 연속이었다. 나는 항상 쫓기듯 살아왔고, 무언가를 항상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얻은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쉽게 얻은 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 특반에 들어가기 위해서, 1등급을 받기 위해서, 대학 입시에서 S대에 합격하기 위해서, 시설 좋은 기숙사에 살고자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 공모전에 입상하기 위해서, 졸업 후에는 인턴에 합격하기 위해서,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로스쿨에 들어가기 위해서, 로스쿨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아 로펌 인턴에 지원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경쟁, 또 경쟁하면서 무수히 많은 경쟁에 노출되어 왔던 것이다.
경쟁 속에서 더 우수한 걸 판별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제한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같은 시간을 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을 대폭 줄이면 그 편차가 커진다. 일부러 시간을 부족하게 만든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사람을 걸러 내기 위해 시간을 앗아간다. 그래서 나는 항상 쫓긴다는 느낌을 받았던 걸까. 언제나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았고, 잠시라도 멈추면 내 그림자를 밟으며 열심히 나를 좇던 시간이 뒤에서 나를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엎어져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 두려움에 뒤를 돌아 보지도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뛰었다.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많은 것은 정해지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수저는 다른 게 아니라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부여 받은 채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영화 제작사 대표 윤 호 같은 사람들. 취미로 직업을 가지는 사람들. 하고 싶은 일을 그저 취미 삼아 해도, 그러다 망해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 그래서 덜컥 과감하고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언제든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사람들. 모든 경쟁 상대를 앞질러 선두에 위치할 수 있는 사람들. 출발선부터가 다른 사람들.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으니 여유로울 수밖에. 여유로우니 얼마든지 젠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불현듯 대학 동기 병준을 떠올렸다. 늘 목표가 뚜렷하고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해 보였던 병준을.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 쳐서 막상 변리사라는 직업을 갖고 보니까, 이건 너무 내 적성에 안 맞다 싶은 거야. 학교 다닐 땐 전문직이 돼야지, 라이센스가 나오는 직업을 가져야지, 순전히 그런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해서 이렇게 원하는 직업을 가졌는데, 왜 이렇게 현실은 다른 건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는 병준의 표정은 이 전에는 본 적 없던 사뭇 낯선 표정이었다.
"고객사 사람들 앞에 앉혀놓고 열심히 고기 굽다가도, 이 사람은 고객이 아니라 내가 친한 선배다, 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그러고 있다가도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그냥 저 자리에 내가 앉아 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내가 저 자리에 앉으면 되는데. 자꾸 이런 생각이 드니까 점점 더 힘들어지더라고.”
병준은 언젠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연락이 왔다.
“나 퇴사했어.”
“언제?”
“좀 됐어. 그리고 이직했어. 나 이제 과거의 ‘나’한테 일 맡기는 고객사 쪽이 됐어.”
“와 진짜? 언제 또 준비해서 그렇게 했대. 멋지다. 축하한다, 야.”
진심이었다. 너무너무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그의 결정이, 용기가, 실행력이, 멋졌다.
나는 윤 호보다는 병준처럼 살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열심히 흔들리면서. 단순하고 느리되, 옳은 방향으로 우직하게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올바른 열정을 발휘하면서.
정부는 P시 지진을 계기로 지속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지진 대비를 위한 민간 건축물의 내진율을 올리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건축물의 안전성을 위한 정확한 진단의 중요성도 커졌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건축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내진설계의 기준과 지속적인 개선이 중요하다. 내진설계 기준은 건축물을 새로 지을 때 지진에 대해 얼마나 잘 견딜 수 있게 만들도록 하는 일종의 지침이다. 우리나라는 1988년 처음으로 신축 건축물에 내진설계를 의무화하기 위해 내진설계 기준을 작성해 제공했고, 역사가 그리 깊지 않은 만큼 여전히 미흡한 면이 많았다.
정부는 민간건축물 내진성능평가 의무 대상 확대, 내진성능평가를 기반한 지진안전 시설물 인증사업 등을 진행하면서 꾸준히 내진설계 기준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P시는 1111지진과 관련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마침내 승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장은 이날 법정에서 열린 1111지진피해 위자료청구 소송 선고공판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1111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원고들에게 지진 트라우마 등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3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지진이 발생한 지 꼬박 5년 만이었다. 지난 5년간 P시지진범시민대책본부는 20차에 걸친 변론을 했고, 그 지난한 과정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셈이었다.
5년이란 시간은 참 길고도 짧구나. 나도 어느덧 20대의 끝에서 30대로 진입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P시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인물과 사건 역시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