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의 기본 개념은 Minimal(최소의)이 아니라, Essential(필수적인)이다.’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미니멀리즘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는 ‘최소한’으로 소유하는 것에 혈안이 돼 물건의 개수를 줄이고, 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 ‘필수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버리는 것이 바로 미니멀리즘이다.
무엇을 ‘버릴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 최소의 개념보다도 필수 불가결한, 본질적인 것이 중요하다. 본질적인 것만 남게 되면 깔끔하고, 단순해진다.
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그중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바로, ‘미니멀리스트’의 등장 및 확산이다. 쓰나미가 집이며 온갖 물건을 다 휩쓸고 지나가자, 남겨진 자들은 물건의 ‘무용(無用)’을 깨달았다.
꾸역꾸역 소유하고 있으면 뭐 하나,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파도가 언제 또 다시 덮칠지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한 몇몇 일본인들은 캐리어 하나에 모든 살림살이가 다 들어갈 정도의 짐만 남기고 모조리 정리했다. 간혹 허무주의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미니멀리스트들은 간소한 물건으로 꾸리는 조촐하고 단순한 삶이 주는 긍적적인 변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단출한 살림으로 살아가니,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불안하지 않았고, 어딘가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게 됐다. 대신 현재에 집중하게 됐고, 소유하는 물건보다는 경험에 돈을 쓰게 됐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가 땅이 흔들려도 정신이 흔들리지 않게 도와줬다. 여러 고난이 닥쳐도 이리저리 휩쓸지리 않게 되었다.
휩쓸리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흔들리지 않는 것조차 이리도 어려운데.
지진이 휩쓸고 간 P시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해안도시인 P시의 바닷가 주변에는 펜션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되자 이곳은 휑해졌다. 사람들은 넘실대는 파도를 보며 쉽사리 그 곳에 머무르지 못했다.
P시는 지난 몇년간 시에서 예산을 쏟아부어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각종 조형물과 공원 등을 조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지난해 착공했던 시설들이 완공됐다. 시에서는 또 예산을 들여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이참에 명실상부한 '관광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주력했다. 효과는 꽤 있었다. 가까운 도시들뿐만 아니라 서울과 수도권,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들도 발걸음을 하고 있는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진이 발생하자 모든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겨 버렸다.
P시는 이제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바닷가 주변은 텅 비었고, 시내 중앙상가에도 '임대문의', '임대' 라고 쓰인 커다란 현수막이 붙은 곳들이 늘어났다. 아파트에도 공실이 늘어나고 있었고, 야심차게 착공한 대형 메이커 아파트사들의 시름이 깊어졌다.
철새가 이동하기만 해도 기사가 났다. 'P시, 또 대규모 새떼 이동…지진 전조 현상?' 식이었다. P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늘 불안에 떨었다.
더이상 사람들은 무거운 물건을 선반 위에 올려 두지 않았다. 서랍 안에 물건들도 가장 낮은 서랍에만 조금 남겨두고 모두 비웠다. 찬장과 선반은 점점 널널해졌다. 간혹 펜트리에 비상 식량을 쟁여 두거나, 비상 대피시 필요한 물건들을 꾸려둔 배낭을 다용도실에 구비해 두기도 했다. 규모에 비해 소비가 높은 도시로 손꼽혔던 P시 경제는 한껏 위축됐다. 사람들은 덜 사고, 덜 움직이고, 심지어 아예 떠났다.
나에게도 어떤 변화가 있었다. 나는 8명의 인턴 중 운 좋게(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운 나쁘게) 2명 안에 들어 무사히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동기가 퇴사하면서 내 기수에서는 혼자가 됐다. 나머지 6명 중에서 누군가가 충원될 줄 알았는데, 회사는 추가 인원을 선발하지 않았다. 모든 선배와 상사들의 관심이 자연히 내게로 쏠렸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당하는 기분이라 숨통이 조여왔다.
당시 나는 언론사에서 일하면서 잡지사에 칼럼까지 기고하느라 너무 과부하 상태였고,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 모두 턱없이 부족했다.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항상 팽팽한 긴장이 온 몸을 점령하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피곤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칼럼 때문에 매 주 공포 영화를 보다 보니,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거울에 비친 몰골은 처참하다 못해 공포스러웠고, 이러다 내가 귀신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상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삶을 단순화 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려고 본격적으로 마음먹은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그 방향으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그 무렵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책 한 권을 읽었다.
책에서는 일단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건 버려라,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싶은 건 버려라, 가슴이 뛰지 않는 건 버려라, 버려라, 버려라, 버려라……. 나는 간혹 좋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좋지 않았던 습관(책을 사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는)에 따라 ‘버려라’로 끝나는 그 랩 가사 같은 내용을 정독했고,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위.
나의 남자친구. 표은위.
나는 은위에게 문자를 보냈다.
'ㅇㅇㅇ-‘은위야’의 초성이다-'
'웅?'
'뭐하고 있어?'
'운동 끝나고 이제 막 집에 왔어.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그랬는데.'
거짓말.
운동 끝나고 이제 막 집에 온 것까지는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뒤는 명백히 거짓말이다. 혼자 좀 뒹굴뒹굴하다가 한 시간쯤 후에 연락하려 했는데, 라고 말했다면 그건 진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 세상은 진실만 가지고는 굴러가지 않는다. 적절한 거짓이 뒤섞여 있어야만 역설적으로 더 진실되고 만다.
'잠깐 볼 수 있어?'
그렇게 보냈더니 갑자기 은위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은위가 뭔가를 감지한 걸까.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일까. 하긴, 내가 갑자기 뜬금없이 보자고 하는 일은 잘 없는 일이다. 이상하다 싶었을 수도 있다, 충분히.
무슨 일 있냐는 질문에 나는 멈칫한다. 이걸 무슨 일 있다고 하기도 뭐하고 없다고 하기도 뭐하다. 하지만 괜히 겁을 먹게 되면 만남을 보류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아냐. 그냥 잠깐 봤으면 해서.”
“알았어, 그리로 갈게.”
은위가 온다. 은위가 약간의 이상함을 감지했든 못했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은 이미 은위를 버릴 준비를 완벽하게 끝냈다. 은위가 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어, 사실 내가 뜻하지 않게 미니멀리스트가 됐는데 말야. 그거랑 관련된 책을 한 권 읽었거든. 근데 읽고 나니까 자꾸 뭔가를 버리라고 하고 나도 뭔가를 버려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는 게 너밖에 없는 거야. 거기서 말하는 모든 ‘버려라’라는 문장의 목적어에 네가 너무 쏙 들어맞는 거야.
남자친구 은위를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라,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남자친구 은위를 버려라, 가슴이 뛰지 않는 남자친구 은위를 버려라,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하는 은위를 버려라……은위를, 은위를 버려라. 그래서 이렇게 불러낸 거야. 너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더는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침내 나는 결단을 내린 거야.
이 따위 우스운 말은 할 수 없겠지. 다만, 우리 헤어지자. 하고 말하고 말겠지. 네가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매달리면 그럼,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이렇게 말하겠지. 그리고 나는 생각하는 시간은 사실 이미 다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네가 알아서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짐짓 기다릴 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했고, 마침내 은위가 왔다. 그런데 은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은위를 버리겠다고 생각한 내가 있는 대로 미워졌다. 은위는 여전히 나에게 너무 따뜻한 눈빛을 하고 있다. 은위의 온도를 나는 따라갈 수 없다. 나는 차가워. 너와 있으면 나는 상대적으로 항상 온도를 잃었다.
"지하야."
불안을 감지한 듯한 은위의 목소리가 미세한 진동을 머금은채 파르르 떨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P시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인물과 사건 역시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