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은위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입술을 앙 다물었다. 몇 번이나 다짐했으나 번번이 말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데이트를 마쳤던 수많은 날을 떠올렸다. 혼자 찝찝함을 간직한 채 손을 잡고 거리를 걷다가 집에 바래다주고 떠나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 오늘도 말 못 했네. 하고 나를 탓하던 무수히 많은 날을.
오늘은 결코 그런 날이 되도록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겠어. 아니, 미니멀리스트가 되려고 너를 버리는 게 아니라, 너를 버리고 나면 나는 자연스레 미니멀리스트가 될 것 같아. 네가 짓누르고 있는 내 삶의 부분이 너무 크다는 걸 너는 알까. 너를 버리고 나면 나는 홀가분하다 못해 공허해지겠지. 5년이라는 우리의 시간이 송두리째 뿌리 뽑힐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만큼 평온해지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
걱정스런 눈빛으로 묻는 은위. 아무 일도 없다는 거 사실 거짓말이야. 역시 세상은 진실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은위와 헤어지기 위해서는, 헤어지려고 은위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다. 적절한 거짓이.
“은위야.”
“응.”
“사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는데…….”
은위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헤어지는 게 맞을 것 같아.”
나는 ‘헤어지자’라고 말하지 않고 헤어지는 게 ‘맞을 것’같다고 말하는 나의 치밀함과 비겁함에 새삼 놀랐다. 그게 맞는 거야. 헤어지는 건 선택이 아니라, 당위인 거야.
당위야, 은위야. 혼자 속으로 발음하면서 당위, 은위, 라임이 맞네, 와 같은 멍청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내 그런 시답잖은 농담조의 생각에 매이는 건 헤어짐을 고하는 사람의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가벼운 죄책감을 느끼며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말장난을 서둘러 무마했다.
맞는 걸 거부하고 틀린 걸 선택할 만큼 은위는 도전적이지 못 했다. 은위는 언제나 무엇이 맞는 선택인지를 고민했고, 사회가 맞다고 하는 선택을 했고, 맞는 일을 했고, 맞고자 계속 맞춰나가는 스타일이니까.
“아니. 지금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맞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
은위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게 정녕 은위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은위가 옳은 일을 거부하고 있었다. 당위성을 부여해도 그건 당위가 아니라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럼 네 생각엔 뭐가 맞는 건데?”
“잘…모르겠어.”
내가 항상 답답하게 생각하는 은위의 우유부단함.
은위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한 나를 잠시나마 미워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그래, 이런 게 쌓여서 헤어지겠다고 결심한 거잖아. 은위한테 상처 주는 너를 미워할 게 아니라, 너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너를 더 미워해야 해. 그렇게 마음이 말하는 듯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맞고 틀리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췄는데 기분 탓인진 몰라도 은위가 아까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눈을 깜빡이는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키는 은위의 울대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가는 게 보였다.
“중요한 건, 내가 헤어지고 싶다는 거야.”
은위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어 번 쓸어넘긴다. 손이 이마를 거쳐 정수리까지 미끄러진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건 은위가 감정을 조절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그렇다면.”
은위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더 빨리 말하지 그랬어. 왜 이제 와서……”
은위는 머리를 또 쓸어 넘긴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앞을 주시하고 있다.
말할 수 없었어.
네 얼굴을 보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네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꾸역꾸역 집어삼켰어. 오늘도 나는 말하지 못할 뻔했는 걸. 나도 겨우겨우 말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그저 눈빛으로 마음을 전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다며.”
“응.”
“언제부터?”
글쎄, 언제부터인지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머릿속에 번져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언제부터.”
은위는 거의 추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은위의 모습이었다.
“잘 모르겠어.”
나는 은위처럼 대답하였다. 은위가 늘 그랬듯이. 중요한 순간에 와서 ‘잘 모르겠어’라고 응수해 상대의 맥이 탁 풀리게 해버리는, 오래된 내 남자친구 은위가 그랬듯이.
하, 하고 은위가 작은 한숨을 뱉어내는 게 들렸다. 내가 그랬듯이.
그리고 그때 알았다. 상대가 몰아세우면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렇다면 나는 매 순간 은위가 모르겠다고 대답할 때마다 은위를 몰아세웠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사람을 절벽 끝으로 몰고 가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정말, 매 순간, 은위는 이렇게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잘 모르겠어’라는 미온적인 대답을 흘린 채 ‘하’하고 몰아쉬는 내 한숨을 들었단 말인가. 그렇게 매번 위축되어 갔단 말인가, 보잘것없이, 처량히.
은위의 ‘잘 모르겠어’는 정말 잘 모르겠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말한 잘 모르겠다는 말은 일종의 무심함, 퉁명스러움을 동반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근데 그게 중요해?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 한숨의 대부분은 답답함에서 나오는 한숨이었으나, 은위의 한숨은 일종의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자기를 기만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여태 자신을 속이고 만나온 것처럼. 하지만 나는 적절히 티를 냈고, 너에게도 시간을 벌어주었고, 너도 어느 정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나와 헤어지는 게 맞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니. 네가 생각해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니?
“정말 그러고 싶어?”
은위가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두 번 쓸어넘겼다.
“응.”
은위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나와 맞춘 커플링이 눈치도 없이 반짝거리며 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나한테 뭐 다른 선택지가 있기나 해?”
은위는 뭔가 억울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려다 분명히 해두고 싶어 굳이 대답했다.
“없지.”
이건 당위야, 은위야.
“대신, 이건 확실하게 해 두자.”
은위가 사뭇 강경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지는 거야. 나는 이게 맞는지 정말 모르겠어. 네가 그러자고 하니까, 그러고 싶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
“고마워.”
바보같은 대답이었다, 고 생각한다. 상대에게 무례하리만큼 차가운 대답이었다고. 하지만 은위가 몇 번이나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감정을 조절해준 덕에 어찌 됐든 이별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점이, 그 모든 과정을 전부 내 책임으로 돌리고 그에 따른 결과까지도 모두 나에게 전가하려 한다 해도 어쨌든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점이, 사무치게 고마웠다. 고마운 건 고맙다고 하는 것만큼 정확한 표현이 없다.
하, 하고 은위는 한숨을 쉰다.
“나는 이게 맞는지 정말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도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이게 맞았다는 걸. 아니 적어도 틀리지는 않았다는 걸. 헤어지지 않는 건 완벽하게 틀린 답이지만, 헤어지는 건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답이라는 걸 너도 살아가면서 알게 될 거야.
“내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지는 거야.”
나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했다.
잔인해, 라는 말이 귓가를 잠시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은위가 말했는지 내 마음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은위는 그런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분명히 그런 울림을 듣기는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짐짓 은위는 다소 무기력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다른 건 다 들켜도 외로운 건 죽어도 들키지 마. 그건 결국 치명적인 약점이 될 테니까. 언제든 건드려질 수 있으니까.”
그건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고픈 말일지도 몰랐다.
은위는 말없이 머리를 연신 쓸어넘겼다. 이제 곧 저 쓸데없이 영롱하고 고급스러운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서 사라질 터였다. 그럼, 사람들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은위의 동작에서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하는 대신에 그의 머리칼이나 이마에 시선을 두게 되리라. 그러면 은위의 숱 많은 짙고 예쁜 눈썹이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 은위의 팔뚝 근육에 시선이 머물 수도 있겠고. 어찌 됐든 은위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은위가 저 반지를 빼면, 비로소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은위는 언제쯤 반지를 뺄까, 생각하면서 약지의 반지를 뺐다. 너무 오래 끼고 있어 마치 한 몸과 같던 반지가 쑥 빠져나가자, 손가락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관성에 의해 찾듯 분주히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뭔가 허전해. 이건 아니야. 나 지금 뭔가가 없어. 빨리 찾아, 빨리. 나는 그런 손가락의 감각을 달래며 꼭 반지의 굵기로 하얗게 줄이 생긴 부분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분명 허전했고, 그 허전함은 어떤 통각에 가까웠지만, 밀린 숙제를 해치워버린 것처럼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언젠가 끝내 버려야 할 숙제였는데, 드디어 끝냈다.
너를 버리고 오는 길, 비로소 나는 온전한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P시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인물과 사건 역시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