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긴 건 나였지만, 허무한 것도 나였다.
그는 분명히 패배했다.
내용증명 앞에서, 무응답 앞에서, 결국 생활비를 내 손에 건넨 그 순간—게임은 내가 이긴 듯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는 마치 “너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계속 약속을 잡고 외출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다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내 안에는 알게 모르게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를 무릎 꿇리기 위해 내가 쏟은 시간과 감정, 전략과 계산.
그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점점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끝내지 못하는 나, 왜 미련을 놓지 못하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아이들에게 귓속말을 했다.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말했다.
“할머니 생신이니까, 주말에 시간 비우래.”
그 순간 내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내게 유리한 판으로 끌고 올까.
그를 어떻게 한 번 더 흔들 수 있을까.
아무도 내가 그 자리에 나타날 거라 예상하지 않을 테니, 나는 반드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과 함께 어머님께 드릴 레터링 케이크를 주문했다.
검소한 어머님을 위해 작지만 정성 어린 화장품 하나도 준비했다.
그런데 준비가 끝나자, 이상하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거기서 무너지면 어떡하지.’
그래. 잘하려고 하지 말자.
그냥, 보통만 하고 오자.
아침부터 단장했다.
새 옷을 꺼내 입고 화장을 했다.
마치 마음고생 한 사람이 아닌 얼굴로.
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길에 나도 조용히 함께 나섰다.
내심,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비해 반박할 말들도 속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 외로 조용했다.
그래, 반은 성공했어.
식당에 도착해 인사를 나눴다.
모두 당황한 눈빛이었지만, 누구도 우리 사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에게 더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거였다.
시부모님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시부모님과 형님들의 자연스러운 모습 앞에서
나는 또다시 ‘밀리는 기분’을 느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다.
아… 그가 평생 이런 기분으로 세상을 살았구나.
처음으로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아이들과 함께 케이크에 초를 켰다.
모두가 카페로 향할 때, 나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날 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외출했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이 구조는 나에게 부당하다.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그는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결국 한 마디를 남겼다.
“당신은 일주일 내내 너무 불성실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어머님 생신을 준비했습니다.
한 번쯤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날짜를 기록해?
집안일 분담표를 만들까?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조금씩 바뀌었다.
‘이렇게 해도 변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가 일찍 들어온 날을 기록해 보여주면 어떨까?’
그때, 목사님이 내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로 당신에게 표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를 완전히 무릎 꿇리려 하는 건,
그의 남성성을 짓밟는 일이기도 해요.”
“그는 지금까지 월급을 다 줬죠. 그런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어요.”
나는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내가 승리를 쥐었지만,
그에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를 움직이는 건 더 강한 채찍이 아니라
존중받고 있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바꿔야 할 것은 방식이지, 목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나는 당근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작게 반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