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실천에 대한 형이상학
쉽게 씌어진 글(feat.윤동주)
내가 사회복지를 시작한 지 딱 10년 만에 제주도로 내려왔으니까 이 일로 먹고산 지도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사회복지 일을 하면서 보람된 일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도 되고 스스로 자괴감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남들은 먹고살기에도 바쁘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 나는 철학자도 아닌 주제에 ‘사회복지란 무엇인지’,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사회복지(사)가 이래도 되는 건지’ 배부른 고민을 하고 또 했더랬다. 덕분에 그런 고민의 흔적들이 쌓여 어쩌다 책을 내기도 했지만, 나는 아직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 채 현실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왜 ‘알쓸복잡’이냐고 묻는다. ‘알쓸복잡’, 풀어서 쓰면 ‘알고 보면 쓸데없는 사회복지 잡생각’이다. 머릿속으로 내내 고민만 하다 보니 세상은 변할 리가 없고 내 삶도 별 볼일 없이 항상 그대로니까 쓸데가 없다는 것이고, 그렇게 쓸데없는 고민은 그냥 잡생각일 뿐이다. 또 혼란스럽기만 한 사회복지 현실을 무심코 살아가는 나의 ‘복잡’한 심경도 담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복지바닥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물론 환경적인 면에서는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사회복지사들이 일(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거기서 거기다. 나 역시 복지부동하는 사회복지 현실에 동조하며 살아 온 1인으로서 같은 동료 사회복지사를 비난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구경하듯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자니 나름 지식인(?)으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소침(銷沈)하게 글쓰기로 위안 삼아 하루하루 버티며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허구한 날 골방에 처박혀 글을 쓴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리가 없고—사실 바뀌지도 않았다—, 동료들로부터 욕이라도 먹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나는 무얼 바라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사회복지 현실은 여전히 안갯속인데 글이 이토록 쉽게 씌어지는 것도 사회복지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새벽 창가에 귀뚜라미가 속살거리는 나의 서재는 출근 전 현실과 마주한 완전 다른 세상이다. 사람이 살면서 자꾸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봤자 먹고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일찍이 나는 깨달았다. 삶이란 배고픈 철학자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보다 하루라도 빨리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후회 없이 사는 지름길일 것 같다. 이제는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나의 삶도 그래야하지 않을까?
사회복지사로 살면서 ‘사회복지실천’에 대해 한 번이라도 깊게 사유(思惟)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사회복지사의 일이 곧 사회복지 실천이라고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회복지사가 그렇게 믿고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다. 다만 그 ‘실천’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이나 현장의 매뉴얼과 같은 업무용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껏 나는 사회복지실천을 이론과 지식에 종속적인 것으로 단정 짓고 실천을 잘 하려면 먼저 사회복지를 —가치와 철학(아니면 매뉴얼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실천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았다. 사회복지실천을 사회복지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짧았다. 사회복지 실천(현장)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가 아니라 무엇보다 ‘실천’ 자체에 대한 반성이 필요했다. 사회복지 현장(조직)이 불합리하다거나 사회복지사(또는 공무원이)가 사회복지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와 철학의 부재가 원인이 아닐 수 있다. 그건 잘못된 ‘실천’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복지(본질)에도 철학(또는 진리)이 있다면 사회복지를 실천하는데도 반드시 철학(또는 가치)이 있어야 한다. 사회복지가 나날이 (양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세상이 변하지 않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건 사회복지사가 무지(無知)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이론이 완벽하고 좋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개떡(?)같이 실천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그동안 나는 알면서 모른 척 살았다.
실천의 형이상학을 찾아 나선 철학자들
다행히도 인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실천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왔다. 놀랍게도 그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에서 인간 삶의 활동영역은 관조적 활동(테오리아, theoria)과 실천적 활동(프락시스, praxis), 생산적 활동(포이에시스, poiesis)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세 가지 활동영역에서 관조적 활동(테오리아)은 현실세계를 벗어나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을 뜻하고, 실천적 활동(프락시스)은 공동체 속에서 행복을 지향하는 삶, 즉 정치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또 생산적 활동(포이에시스)은 특정한 목적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활동을 통해 향락을 추구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활동영역에 필요한 고유지식이 존재한다고 했다. 관조적 활동에는 학문적 지식(에피스테메, episteme)이 존재하고, 실천적 활동에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 phronesis)가, 생산적 활동에는 기예(테크네, techne)가 존재한다고 했다.
역시 철학자가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는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스스로 쉽게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해석을 덧붙인다면, 인생에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학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고(공부를 해야 하고), 공동체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삶의 지혜(더불어 어울려 사는 도덕적 품성? 인성?)가 필요하고, 물질적으로 향락을 즐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테크닉(technic) 즉,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인 것 같다.
여기서 사회복지사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과 실천적 지혜일 것이다. 실천적 활동(프락시스)에 필요한 고유지식인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지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술도 아니다. 실천적 지혜는 이성을 동반한 참된 품성으로서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적(또는 규범적) 품성을 통해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에 실천적 활동의 목적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잘 실천한다(eupraxia)’는 것, 그 자체라고 말한다(김기덕, 2023). 이는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를 실천하는데 스스로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실천논의는 현대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이하 ‘실천(practice)’으로 표기)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labor)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행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노동의 근본 조건을 삶 그 자체로 본다. 그리고 작업(work)은 인공적인 산물을 제공하는 활동으로 인간이 스스로 만든 제도와 문화 속에서 일정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활동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실천(practice)은 노동이나 작업으로 생긴 인공적인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본질적 조건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나의 존재는 타인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타인과 교류하는 행위, 즉 실천(practice)이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활동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공동체 속에서 다원성을 전제로 언어, 행동 등 구체적 실천(practice)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인격성을 드러내고 타인과 공감하고 자유를 향유하며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세 가지 활동영역을 비교해보면, 아렌트의 노동(labor)과 작업(work)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포이에시스(생산적 활동)의 개념과 맞닿아 있고, 아렌트가 말한 실천(action; practice)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락시스(실천적 활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실천 활동을 통해 이루어질 정치적 삶을 강조했듯이 아렌트 역시 정치철학자답게 노동과 작업을 강요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비판하면서 타인과 교류하는 인간 본연의 실천행위가 개인과 공동체의 정치적 삶을 위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김기덕, 2023).
사회복지 실천철학의 회복
(말이 어렵긴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렌트의 형이상학적 실천 논의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사회복지를 실천해야 할지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활동의 목적이 외부에 존재하는 ‘생산적 활동’이 아닌 규범적 이성과 도덕적 품성과 같은 목적 자체를 내재하고 있는 프락시스(실천활동)를 강조했다. 아렌트 또한 노동과 작업처럼 누군가(외부)로부터 강요당하는 일(work)로 하는 활동이 아닌 개인과 사회를 위해 사람끼리 교류하는 본연의 실천(practice)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복지실천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포이에시스(생산적 활동)가 아니라 프락시스(실천적 활동)가 된다. 그리고 아렌트에 따르면 사회복지실천은 일(work)로서가 아니라 실천(practice)이어야 함이 분명해진다. 결론적으로 사회복지사는 (실천적)지혜를 갖춘 ‘실천가(practitioner)’이여야지 (생산적)기술을 가진 ‘워커(worker)’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실천(practice)의 어원은 프락시스(praxis)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는 사회복지실천의 모습은 어떠한가? 대학에서 사회복지실천을 ‘social (welfare) practice’로 배웠지만 현장에서는 사회복지실천을 ‘social work(사회사업)’로 하고 있다. 그렇게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닌 일(work)로서 노동을 하는 소셜워커(social worker)로 남았다.
가끔 사회복지사들은 스스로를 ‘실천가’로 부르기도 한다. 실천가라고 하면 왠지 철학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 ‘철학’이라는 것이 사회복지에 대한 철학(가치와 본질 등)인지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행동 자체에 대한 철학인지 잘 분간이 안 된다. 이제는 사회복지의 철학과 실천철학을 명확히 구분해야 할 것 같다. 실천에 대한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워커’라고 부를 리가 없다. ‘work(일)’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와 문화 속에서 그저 외부에서 주어진 목표대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활동일 뿐이다.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실천을 하는 목적이 자신의 외부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사회복지실천의 목적은 일(work)이 아니라 실천(practice),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 취미생활로 글을 쓰는 내가 철학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너무 주제 넘는 일 같다. -알쓸복잡
** 이 글에서 어렵고 철학적인 문장들은 전부 김기덕 교수님(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의 논문을 참고한 것이니 필자를 과대평가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참고논문:
- 「사회복지 ‘실천’의 본질에 관한 실천철학적 탐색」, 김기덕, 2023, 한국사회복지학
-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詩)”
사족(蛇足): 대한민국 '소셜워커'의 기원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복지는 1950년대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구재(救災)하기 위해 미국에서 도입된 ‘social work’가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때 당시에는 ‘social work’를 우리말로 마땅히 번역할 단어가 없어서 일제 강점기 때 자선사업의 의미로 쓰던 ‘사회사업(社会事業)’을 그대로 모방해서 가져왔다. 그리고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사회사업가(social worker)’라고 불렀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부터 자선적 의미의 사회사업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로서의 사회복지(social welfare)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사업가’라는 명칭도 1983년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면서 지금의 ‘사회복지사’로 바뀌게 됐다.
나라가 점점 발전하면서 사회사업(social work)은 사회복지(social welfare)로 바뀌고, ‘사회사업가’도 ‘사회복지사’로 호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사회복지사를 영어로 ‘social worker’라고 쓴다. 1950년대의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사회사업가는 지금의 사회복지사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지금의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뿐만 아니라 상담사, 치료사, 활동지원사, 사무원, 운전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직들이 종사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social worker’는 맞지만 전부 사회복지사는 아니다.
의사(doctor)를 ‘메디컬 워커(medical worker)’라고 부르면 듣는 의사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의사와 의료종사자는 염연히 다른 말이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사협회에서는 아예 사회복지사를 '소셜워커'라고 천명을 하던데, 이러다간 사람들이 소셜워커가 전부 사회복지사라고 인식될까 걱정이다. 예전에야 마땅히 번역할 말이 없었다고 치더라도 아직까지 사회복지사를 관행적으로 (그것도 한글로) ‘소셜워커’라고 말하는 건 철학도 없을 뿐더러 너무 성의가 없다. 이제는 사회복지사를 '사회복지를 일로 하는 사람'으로 통칭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사회복지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