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기를 멈추게 되는 것.
살아있기가 멈춰지는 것.
그 일이 어느 날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틈 사이에 '어차피'라는 전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차피 언젠간 죽을 텐데.', ' 어차피 언젠간 다 끝날 일인데.'
나에게 그 '어차피'는 공허함을 증폭시키는 영향을 주곤 했다.
재미있는 건 어차피라는 단어를 나 자신에게 쓰는 경우는 오히려 긍정적이고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담담한 모습으로 포장하기 딱 좋은, 일종의 실수 보호막 같은 마법의 단어 같았다. 그래서 어차피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로 일부러 쓰기도 했다.
'어차피 어떻게 하지 못했을 거야.', '어차피 지나간 일인데.', '어차피 그게 최선이었지.'
그런데 나는 어차피를 점차 미워하게 되었다.
어차피가 미워진 이유가 있는데,
나 이외에 타인이 낀 이야기 속에서 어차피는 부정적이고 항상 아픈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쉽게 말해 어차피에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 그 어차피는 너무 슬퍼졌다.
'우리는 어차피 헤어질 건데 왜 함께해?' , '어차피 우리는 오랫동안은 함께하지 못할 사이였잖아'
'너랑 나는 어차피 여기까지야.'
어차피가 원망스러웠다. 죽음을 생각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이 어차피가 미웠다.
게다가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도 굳이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에서 항상 숨 쉬고 있는 이 어차피는
그냥 내게 너무 잔인하다.
우리가 만났을 때 쥬도는 열 살이었다.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달력은 계속해서 넘어갔고 2014 6월 14일 생인 쥬도는 열한 살이 되었다. 고양이의 세계에서는 노년기.
지금의 건강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그러나 쥬도의 종이 가지고 있는 유전병 중 하나는 신장병이다.
소니야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고 사실 겉보기에는 멀쩡하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고 믿기지 않지만 검사결과에서 역시나 그의 신장이 보통의 단계는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나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급속도로 나빠지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그럼 그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했다. 소니야는 그 말을 하면서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번져있었다.
소니야를 보면 대단하고 신기하며 특이하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녀의 태도에서 존경스럽기도 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항상 일관성 있는 태도와 어떤 일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척을 잘 하는 것 일수도 있고 정확한 속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아주 잘 해낸다.
때로는 힘든 일도 오히려 더 짓궂고 해학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죽음의 이야기 앞에서도 소니야는 슬픈 표정을 절대 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실은 그녀는 동물을 정말로 그 누구보다 많이 사랑한다. 우리가 동물입양센터를 운영하면 참 잘 어울리겠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동물에 대한 지식도 많고, 그만큼 애착도 크고 이어서 사람 관계에서도 마음이 정말 따뜻하다. 그런 다정한 모습과는 달리 무거운 주제에서 웃음을 입가에 환하게 퍼트리며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것은 그녀의 삶을 대하는 일종의 방식이자 태도일 뿐이지, 절대로 그녀가 죽음에 대해 가볍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래 봐오면서 듣고, 느끼게 된 나는 오히려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원래 쥬도를 데리고 있던 자신의 할머니의 심각한 상태를 이야기할 때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불편하지 않은 화법과 톤 그리고 평소에 보여주는 털털한 모습이 아주 잘 어우러져 너무나 자연스럽게 죽음을 언급하는데 나는 그런 소니야가 절대로 무례하거나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소니야의 태도를 보니 '어차피 죽을텐데..' 라는 생각을 '어차피 죽을텐데 그렇다면 우리 함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 보면 어떨까?' 라는 메세지를 주는듯 했다.
11살의 노묘가 나의 가족이 되고 나서 솔직한 심정으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내 옆에 있는 어떤 것이, 내가 너무나 신경 쓰는 어떤 것이, 소중하고 그리운 어떤 것이 어느 날 사라진다는데 나는 그 생각안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매일 아침 문을 열면 내 인기척을 벌써 듣고 문 앞에 꼬리를 세우고 마중 나와 하루 중 가장 큰 소리로 야옹하면서 나의 아침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가 어느 날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허할까?
사람마다 철학이 다르겠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죽음을 생각하며 지내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방향으로 점점 걸어가게 되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니 살아가는 순간순간에 더 귀 기울이며 집중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들이 귀중해진다.
쥬도 그리기의 시작도 문득 이 사랑스러운 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최대한으로 기록하는 것이 그를 강렬하게 내 안에 남기고 추억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내가 해야만 하는 과제이며 나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사무쳤던 즈음에 시작했다.
나는 창작으로서 쥬도와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차곡차곡 남겨야만 한다. 그리고 되돌아볼 나중의 시간 속에서 가장 생생하고 살아있는 듯한 추억으로 품어내고 싶고, 내가 받고 있는 매일 아침의 행복에 대한 보답인 것 같으니까 나는 계속해서 어떤 방법으로든 창작을 이어 나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