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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블라인드 데이트 2

by 댄스댄스댄스


2.

피아노 멜로디와 함께 방에서 나온 그는 작은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문 바로 옆에 놓여있는 택배 박스를 집어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택배를 거실 소파에 던져두고, 입고 있던 반바지와 면티를 훌렁 벗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황급히 거실로 나와 귀에 꽂혀있던 와이어리스 이어폰을 식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 손으로 물줄기의 온도를 확인했다. 물은 바로 적당히 따뜻해졌고 그는 그 속으로 몸을 넣었다. 머리 한복판에 쏟아지는 물은 얼굴과 목, 어깨와 등, 가슴을 지나 몸 전체를 간지럽히며 흘러내려갔다. 따뜻하게 체온이 올라오며 무뎠던 감각이 살아났다. 감각이 돌아오면서 천천히 뭉친 실타래처럼 기억도 흐물흐물 풀렸다. 전날 어떻게 잠들었지. 떠오르지 않았다. 무거운 머리로 어젯밤 퇴근 후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기억을 하나하나 복기해 보았다. 최초의 기억에서 그 이전의 기억으로, 또 그 이전의 기억으로. 빈 공간은 뿌연 장면으로, 거울을 물들이 증기를 닦아내듯 이내 선명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되살린 기억은 볼품없었다. 과거 다른 목요일 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마치 순간순간의 기억이 뭉뚱그려져 완만한 곡선만 남은 덩어리가 되면서 구체성이 사라져 버린, 앙상한 문장으로 표상된 기억이었다.


주 4일 근무를 실시하는 회사. 목요일이 지나면 주말이 찾아온다. 어제는 운 좋게 재택근무를 하였고 적당히 지루한 회의와 적당히 복잡한 업무를 제아와 함께 처리했다. 다행히 그가 근무하는 회사는 업무 수행에 있어 BAIS(Business AI Secretary)뿐만 아니라 PAIS의 조력도 가능한 허용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그가 업무 수행자가 아니라 AI가 하는 업무를 돕는 조력자 같다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일찍 일이 마무리된 오후부터 저녁까지 그는 제아, 즉 인공지능 알고리듬이 제시한 최적의 선택지 몇 가지 중에 결정하는 행위를 몇 번 반복했다. 제아가 추천한 운동 가이드 중 하나를 골라 오랜만에 가장 효율적인 홈트레이닝을 한 후에, 그의 과거 배달 이력을 바탕으로 최적의 포만감과 건강까지 고려한 저녁 메뉴를 결정했다. 식사 배달을 기다리면서 그의 알고리듬에 따라 추천 콘텐츠 중 하나를 선택하였고, 그 영상 속 인물들과 함께 배달된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늦은 저녁부터는 언제나와 같이 스크롤 무브(scroll move)가 시작되었다. 때로는 직접 터치로, 때로는 리모컨으로 티브이 화면을 위, 아래, 좌, 우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짧은 영상을 보고 넘기고 또 보고 넘겼다. 반응 태도를 꽤나 완고하게 설정한 제아의 권고, 또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영상에 안주하지 못했다. 침대 위에 앉아, 네 캔의 맥주를 마시는 동안 그 짧은 영상들 중 하나도 끝까지 시청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화면을 바꿔 나갔다. 세상에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콘텐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기도 하고. 광고 영상이 뜨면 술기운에 "내가 이거 구독료를 얼마를 냈는데, 광고를 띄워"라며 소리 내어 욕을 퍼붓기도 했다. 언제나 그 끝은 멍한 자괴감과 자책감. 그리고 잠드는 순간의 망각. 어떻게 잠들었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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