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은 17년 동안 그 화면 앞에서 멈춰 있었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시스템의 초기 화면. 아이디 입력란. 공인인증서 선택 창. 그는 매일 아침 이 화면을 띄우고 매일 아침 닫았다. 채권자에게 인증서를 빌려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채권자의 가장 민감한 디지털 신원이다. 빌려달라고 말하는 순간 신뢰가 깨진다. 그러나 빌리지 않으면 소송은 한 발도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17년 동안 채권자에게 전화를 걸어 "본인 명의로 소장을 접수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채권자가 시간이 없다고 답하면 사건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멈춘 사건은 소멸시효를 향해 흘러갔다.
법원 시스템의 외벽을 17년 동안 배회한 사람의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이 어느 오후 책상을 정리했다.
이제 다른 손을 상상한다.
같은 화면 앞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그가 입력하는 아이디는 채권자의 이름이 아니다. 자기 법인의 이름이다. 공인인증서도 자기 법인의 것이다. 위임장이 필요하지 않다. 채권자의 허락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는 로그인 버튼을 누른다. 시스템이 열린다. 소장 접수 메뉴가 뜬다. 그는 자기 이름으로 소장을 작성한다. 자기 이름으로 첨부서류를 등록한다. 자기 이름으로 제출 버튼을 누른다.
이것이 당사자의 손이다.
로그인 버튼 하나가 세계를 가른다.
채권추심이 실패하는 근본 원인은 추심인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Part 1에서 이 명제를 법적 무능력으로 증명했고 Part 2에서 해외 비교로 확증했다. 이제 Part 3에서 설계한다. 어떻게 추심인을 당사자로 만들 것인가. 그 설계의 첫 번째 공리는 신탁법 제2조다.
조문은 짧다. "위탁자가 특정의 재산권을 수탁자에게 이전하거나 그 밖에 처분을 하고, 수탁자로 하여금 수익자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그 재산권을 관리, 처분, 운용, 개발, 그 밖에 신탁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행위를 하게 하는 법률관계." 이 조문이 위임과 신탁을 가르는 단 하나의 결정적 경계를 그어 놓았다. 위임은 소유권을 이전하지 않는다. 신탁은 이전한다. 위탁자가 채권을 수탁자에게 이전하는 순간 그 채권의 법적 소유자가 바뀐다. 이 한 줄짜리 사실이 이 책 전체가 설계하는 모든 변혁의 토대다.
소유자가 되면 무엇이 열리는가.
먼저 정보가 열린다.
금융분야 마이데이터 서비스가 2022년 전면 시행되었다. 채무자가 본인 정보 제공에 동의하면 적법한 권원을 가진 사업자는 API를 통해 채무자의 금융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핵심은 '적법한 권원'이다. 위임직은 권원이 없다. 그는 채권의 소유자가 아니라 채권자를 대리하는 자다. 대리인은 자기 이름으로 정보 접근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위임직의 책상에는 17년 동안 같은 종류의 엑셀 시트만 놓여 있었다. 이름, 전화번호, 원금, 연체 기간. 네 개의 열.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없었다.
신탁법 제2조에 따라 채권을 이전받은 수탁자는 다르다. 그는 채권의 소유자로서 독자적 권원을 가지고 마이데이터 API 연동을 요청한다. 채무자의 금융 DNA가 수탁자의 시스템으로 흘러들어온다. 원계약서, 이자 산정 내역, 과거 상환 이력, 담보 설정 내역, 최근 3개월 금융 거래 패턴, 보유 자산 목록. 위임직이 17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데이터가 첫 출근일에 수탁자의 화면에 뜬다. 그림자가 사라진다. DNA가 보인다.
이 차이가 협상 테이블에서 무엇을 만드는가.
채무자가 위임직에게 말한다. "그 돈은 이미 다른 명목으로 갚았습니다." 위임직은 멈춘다. 본사에 연락한다. 본사가 채권자에게 확인한다. 채권자가 회계장부를 뒤진다. 답변이 내려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린다. 그 사이에 채무자는 자취를 감춘다. 같은 채무자가 수탁자에게 같은 말을 한다. 수탁자는 자기 시스템에서 과거 입금 내역을 1초 만에 조회한다. 그 입금이 다른 채권에 충당된 사실을 즉석에서 확인한다. "확인했습니다. 그 입금은 별건입니다. 이 채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협상이 멈추지 않는다. 협상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는다. 채무자는 그 순간 직감한다 — 이 사람은 결정권자다.
기득권은 여기서 첫 번째 반박을 꺼낸다.
신용정보회사 본사의 어느 임원이 말한다 가정한다. "비변호사가 자기 이름으로 법원 전자소송 시스템에 로그인하는 것은 전자서명법 위반이다. 변호사법 제72조의 법률사무 취급에도 해당한다. 위법한 구조다."
이 반박은 위임 구조를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한다. 신탁법 제2조의 작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반박이다.
수탁자는 비변호사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 비변호사라는 분류가 적용되는 자리에 있지 않다. 그는 채권의 법적 소유자다. 자기 재산을 회수하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모든 채권자가 가진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변호사법 제72조의 보호 대상은 "타인의 법률사무"다. 자기 재산의 회수를 위한 소송 제기는 타인의 법률사무가 아니다. 자기 사무다. 내 돈을 떼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소장을 접수하는 것을 변호사법 위반이라고 처벌하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전자서명법도 마찬가지다. 시스템은 소송 당사자 본인의 공인인증서를 요구한다. 수탁자는 신탁법 제2조에 따라 채권을 이전받은 소유자이고 그 채권에 관한 소송의 본인이다. 자기 법인의 인증서로 자기 사건에 접근하는 것은 시스템의 정상적 사용이다. 편법이 아니다. 우회가 아니다. 시스템이 설계된 본래의 방식이다.
대법원 2012다40274가 확인한 소송신탁 금지의 원칙도 이 자리에서 다시 살펴본다. 법원은 "소송 행위만을 목적으로 하는 신탁은 탈법적이다"라고 판시했다. 이 판례를 들고 와 수탁자의 소송 수행을 공격하는 시도가 있을 것이다. 그 시도는 판례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뒤집는다.
법원이 무효로 본 것은 오로지 소송만을 목적으로 권리를 양도받는 형식적 신탁이다. 금전채권신탁업자는 그런 자가 아니다. 그는 채권의 신용 조사를 수행하고, 채무자의 변제 능력을 진단하며, 분할 납부 스케줄을 조정하고, 담보권을 설정하며, 회수 가능성을 평가하고, 최후 수단으로서의 소송을 수행한 뒤, 회수금을 정산한다. 채권의 생애주기 전반을 관리하는 종합 자산 관리자다. 소송은 그 관리의 한 부분일 뿐이다. 대법원이 무효로 배척한 탈법적 소송신탁이 아니다. 신탁의 본령에 부합하는 관리신탁의 실천이다.
판례를 무기로 쓰는 자는 그 판례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정확히 읽지 않은 판례는 자기 발등을 찍는다.
정보의 잠금이 열린 다음 실행의 잠금이 열린다.
수탁자 법인은 자체 클라우드 리걸테크 시스템을 법원 전자소송 시스템 API와 연동한다. 수탁자는 신탁법 제2조에 따라 채권의 완전한 소유자로서 단독 소송 당사자 적격을 가진다. 이 적격이 시스템 인증의 법적 기반이다. 수탁자는 자기 법인 인증서로 시스템에 접속하고, 수탁받은 모든 채권에 대해 자기 명의로 절차를 진행한다. 위임장이 필요하지 않다.
이 구조가 만들어내는 것은 규모의 경제다.
소액 채권 수천 건이 수탁자의 시스템에 업로드된다. 납품 대금 500만 원 1,200건, 개인 간 대여금 300만 원 800건, 하도급 미수금 200만 원 1,500건. 각 채권의 채무자, 채권 발생일, 청구 금액, 이자 기산일이 데이터베이스에 정리된다. 알고리즘이 채무자별 지급명령 신청서를 자동 생성한다. 인적사항이 정확히 기재되고, 청구 취지가 표준 양식으로 작성되며, 청구 원인이 채권 유형별로 자동 구성된다. 누락이 없다. 오타가 없다. 형식 흠결로 인한 보정 명령이 발생하지 않는다. 수만 건이 법원 전자소송 API를 통해 일괄 접수된다.
위임직이 한 건의 지급명령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채권자와 통화하고, 서류를 받고, 변호사에게 전달하고, 변호사 사무소에서 작성된 서류를 다시 확인하고, 송달료를 입금받고, 접수하기까지 평균 일주일이 소요된다. 그 일주일 동안 수탁자의 시스템은 수만 건을 처리한다.
승소 판결문이 확정되는 순간도 다르다. 위임직 구조에서 판결문은 채권자에게 전달되고, 채권자가 변호사를 선임하며, 변호사가 재산명시 신청을 하고,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3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 사이에 채무자는 재산을 빼돌린다. 수탁자 구조에서는 집행권원이 확보되는 순간 신용정보망과 연동된 재산조회 시스템이 자동으로 가동된다. 채무자의 예금, 부동산, 차량, 가상자산이 실시간으로 색출된다.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이 전자적으로 일괄 신청된다. 채무자가 자산을 빼돌릴 시간을 시스템이 빼앗는다.
위임직은 채권을 건당 처리한다. 수탁자는 채권을 포트폴리오로 처리한다. 이 차이가 산업의 다른 세대를 가른다.
202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직면한 사법적 아노미를 보라.
복수의 추심채권자가 동일 채무자를 상대로 산발적으로 압류를 신청한다. A 채권자가 채무자의 예금을 압류하고, B 채권자가 같은 예금에 또 압류를 걸며, C 채권자가 채무자의 부동산을 가압류하는 동안 D 채권자가 채무자의 임금을 압류한다. 하나의 채무자를 두고 동시에 진행되는 4개의 소송, 4명의 원고, 4명의 변호사, 4건의 송달, 4번의 변론기일. 법원 자원이 절차적 중복으로 고갈된다. 당사자 적격이 혼탁해진다. 사법적 아노미.
전문 수탁자가 개입하여 4명의 채권자로부터 채권을 신탁받아 통합 관리하면 풍경이 바뀐다. 수탁자 한 명의 이름으로 당사자 적격이 일원화된다. 하나의 소송, 하나의 원고, 하나의 변론기일. 4건의 절차가 1건으로 압축된다. 소송경제가 극대화된다.
이것은 단순히 민간의 효율 문제가 아니다. 사법 인프라의 건전성 문제다. 법원이 처리할 수 있는 사건 수에는 한계가 있다. 절차적 중복이 그 한계를 잠식한다. 신탁 구조가 그 잠식을 막는다.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를 열어 고민한 문제의 해답이 입법자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입법자가 그 해답을 집어 들기만 하면 된다.
진정한 전문성은 권한에서 시작된다.
김 부장은 17년 동안 채무자의 표정을 읽었다. 첫 통화에서 협상이 가능한지 직감했다. 사해행위의 정황을 현장에서 포착했다. 자산 은닉의 패턴을 학습했다. 그 17년이 만든 전문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현장에 없다. 그러나 그 전문성이 매번 멈추는 곳이 있었다. 전자소송 시스템의 로그인 버튼. 사해행위취소소송의 원고란. 형사 고소장의 고소인 서명란. 이 세 곳에 자기 이름을 쓸 수 없는 한 그의 전문성은 끝내 권력이 되지 못했다. 17년이 매일 아침 0년이 되었다.
당사자가 된 수탁자는 그 장벽들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로그인한다. 원고란에 법인명을 기재한다. 고소인으로 서명한다. 마이데이터 API가 채권의 DNA를 전송하는 동안, 전자소송 API가 수천 건의 지급명령을 법원 서버에 일괄 등록하는 동안, 강제집행 시스템이 채무자의 은닉 자산을 실시간으로 색출하는 동안 — 수탁자는 그 모든 과정의 주어로 서 있다. 17년의 전문성이 처음으로 권력과 결합한다.
그러나 의심이 따라온다.
이 당사자가 자기 손에 들어온 회수금을 빼돌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가진 자가 그 권한을 자기 호주머니로 돌리지 않을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위임 구조가 그토록 견고하게 본사-지점-위임직의 삼중 감시를 유지한 이유가 바로 이 의심 때문 아니었는가.
좋은 의심이다. 다음 챕터에서 그 의심을 정면으로 답한다. 위임 구조는 좀도둑 하나 처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 대법원이 판결로 증명한 그 촌극부터 시작한다.
당사자가 된 자는 법정에 로그인한다. 대리인은 버튼조차 누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