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INFJ, 그리고 육아

문제는 언제나 'J'였다

by 차윤




MBTI 검사가 지금처럼 유행하지 않았던 20년 전, 대학생 시절인 그때부터 나는 확신의 외향형 'E'였다. 사람을 좋아했고,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3년 전, 휴직을 계기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에 훨씬 마음이 편해지면서 'E'로 쭉 뻗어있던 그래프가 서서히 'I'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 시점 이후부터는 이제 'I'성향이 조금 더 높게 나오는 'INFJ'가 되었다.


내향형 'I'로 성향이 변화하고 난 뒤에 시작된 육아. 제일 좋은 건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타인에게 맞춰주느라 늘 긴장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불필요한 인간관계나 타인에게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남편과 아기, 가족, 그리고 정말 편안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육아를 하다 보면, 여유가 없어 주변의 안부와 챙김만 받고 있는 요즘이긴 하다. 그럼에도, 내 안의 조용한 시간을 조금씩이나마 붙잡으며 아기와 나만의 리듬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이 좋다. 혼자가 좋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남편과 아기와 나' 이렇게 셋만 있는 시간이 좋다. 가족 이외의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외로움보다는 단단함이, 심심함보다는 아늑함이 느껴진다.




'N' 직관형. 나는 작은 단서와 행동에서 패턴을 읽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럴싸하게 썼지만, 사실 그냥 머릿속이 늘 분주한 사람일 뿐이다. 아기를 보면 머릿속이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쌍꺼풀이 곧 생기려나. 자다가 일어나면 생기는데, 왜 가만히 있을 때는 안 보이지?' '손가락, 발가락 모양은 남편 같은데', '식욕은 나인데, 식성은 남편인가' 별것 아닌 생각들이지만, 아기를 보면 계속 이런저런 상상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기를 바라보다가, 혼자 웃기도 하고, 한숨도 쉬고, 생각의 꼬리를 따라 마음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눈앞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이야기를 붙이고, 마음대로 스토리를 만들어 놓는다. 이게 'N'의 장점이 될 때도 있지만, 동시에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피곤함이 몰려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상상과 현실사이를 오가며 하루를 버티는 요즘이다.




나는 아기와 매 순간 마음으로 연결되고 싶어 하는 강한 감정형 'F'다. '엄마, 아빠, 응가, 빠빠, 까까' 다섯 단어만 할 줄 아는 16개월 아기의 울음, 웃음, 손짓을 읽고 또 공감하려고 오늘도 애썼다. 나에게 육아란, 단순히 돌보는 일이 아닌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 시간이다. 아기가 두 팔을 벌려 달려 안겨올 때, 내 양볼을 쓰다듬으며 웃어줄 때. 나는 요즘 이 순간이 바로 '별것 아닌 행복'인가 싶다.


하지만 늘 감정이 앞서 쉽지 않다. 아기가 이유 없이 물건을 던지거나, 극도로 낯을 가려 오열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지고 불안해진다. 논리보다 감정이 먼저인 탓이다. 그럼에도 아기를 다독인다. 아기에겐 최대한 따뜻한 얼굴을 하고, 마음으로는 '왜 울어, 금방 괜찮아질 거야' 하고 'T'가 되려 노력한다. 감정으로 맞닿는 순간마다, 내가 아기를 지켜야 하는 이유와, 이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깨닫는다.




문제는 언제나 계획형 'J'였다.


나는 소름 돋는 계획형이다. 일례로 나는 갑자기 약속을 잡지도 않지만, 갑자기 약속이 잡히는 것도 싫다.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지도 않지만, 갑자기 취소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를 일정한 리듬 속에서 보내야 마음이 편안하고, 손발이 꼬이지 않는다. 회사에 출근할 때도 거의 정확한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그날의 할 일을 다이어리에 기록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계획이 맞아떨어질 때, 나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면서 그 모든 계획은 무너졌다. 아기가 자야 이유식도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방 정리도 하고, 그때부터 야근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온전히 아기의 컨디션에 달려 있다니. 아기가 잠을 일찍 자면 하루가 술술 흘러가지만, 밤늦게까지 버티는 날이면 내 안의 'J'가 흔들렸다. 내가 생각한 시간보다 더 딜레이 되어 아기가 제시간에 잠들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아니 왜 화가 나지...'


당황스러웠다. 나도 기계처럼 제시간에 잠드는 것이 아니면서, 왜 아기가 안 잔다고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그 화는 아기에게가 아니라,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하루에게 나는 것 같았다. 이유식 냄비, 설거지 더미, 어질러진 방.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좌절하고, 울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이 흐름을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육아가 시작되며 나는 평생을 'J로 살다가 P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소 즉흥적이어야 했고, 유연해야 했고, 때론 계획을 포기해야 했고, 내려놓아야 했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계획이 없는, 아니 세워봤자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 일과는 마치 내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육아가 원래 그런 것을 어쩌겠나. 육아는 세워놓은 계획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흐름을 통제할 수는 없어도, 마음만은 지킬 수 있다고 되뇐다. 이제는 하루가 뒤죽박죽이어도, 아기가 웃고 건강히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루의 순서가 틀어져도, 내가 중심을 잃지 않는 한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완벽한 계획 속에서 사는 것과, 예상치 못한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국 같은 문제의 다른 면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아기와 함께 하루를 보낸다. 흐트러진 시간 속에서도,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중심을 잡아가며 말이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그래도 애는 있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