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행이야
'뭐지.... 저 눈빛은?... 저 미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던 남편의 표정이 아니다. (본인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지만) 연애할 때도 저런 얼굴은, 글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도 분명 나를 좋아했고, 지금도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지만, 요즘 남편이 아기를 바라볼 때의 얼굴은 완전히 결이 다르다. 그냥 무장해제되어 마음이 먼저 훅- 가버린 사람의 얼굴이랄까.
아기가 남편 손가락을 잡거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해도 남편 얼굴이 환해지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억지로 꾸미는 미소가 아니라, 그냥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걸 참지 못하고 드러나버리는 표정,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할 때 나오는 가장 원초적인 얼굴. 우리 딸 앞에서의 남편은 근심도, 피로도, 내일의 할 일도 다 잊은 사람처럼 보인다.
'저런 아빠가 있는 우리 딸이, 참 부럽다'
'부러움'이란 단어를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떠올린 적이 있었나 싶다. 억울하거나 모자라서 느끼는 감정도, 날카롭고 서러운 감정도 아니다. '부럽다. 그래서 너무 다행이다'라는 마음.
나의 아빠는 '집'이라는 장소에 크게 정을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엄마 말로는 '주 7일이면 10일을 술자리에 나가는 사람, 친구를 좋아하고 밖을 좋아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던 나는, 어린 마음에 '원래 아빠는 이런 존재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허전함이 사실보다 조금 더 과장된 건지, 아니면 크면서 생긴 상처가 오래 남아, 희미하게나마 있었을지도 모를 아빠와의 좋은 기억들을 덮어버린 건지. 그게 상처인지, 결핍인지. 아니면 단순한 어른의 해석인지. 이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 해도, 나에게 아빠의 빈자리는 분명 있었다.
요즘 남편을 보면, 내 안의 옛 감정들이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재배열된다. 아기에게 말을 걸 때의 다정함, 아기가 잠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시간, 걷는 듯 뛰어다니는 아기에게 본인의 검지손가락을 언제나 내어주고 있는 손 모양. 나는 어쩌면 남편에게서 '새로운 아빠'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친구들을 볼 때면 '햇볕 가득한 너른 마당'이 떠올랐다. 언제든 어디서든 어두운 마음이 툭 튀어나와도 다치지 않을 것 같은 친구들. 사랑받은 기록이 몸에 밴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 아기를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정서적 금수저로 자라나길,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몸으로 먼저 배운 사람이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남편 덕분에 생각보다 더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여전히 마당이 없는 집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내 딸은 너른 마당을 가진 아이로 자랄 수 있을 것 같다는 안도. 내가 갖지 못한 따뜻한 볕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 번지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것이다.
세상에 다행이라는 감정이 있다면 바로 이런 걸까. 내 어린 시절의 공백과 결핍까지, 어쩌면 남편의 육아 방식이 대신 메워주는 것 같다.
내 남편이 아빠인 우리 딸,
그런 우리 딸이 참 부럽고, 그래서 더없이 다행이다.
요즘 글을 자주 올리지 못했습니다. 아기의 수면 패턴이 바뀌어, 너무 늦게 잠이 듭니다. 잠들기를 기다리다 함께 잠들어버리기도 하고, 가끔 아기가 일찍 자는 날도 반찬을 만들거나 방정리를 하다보니 글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린이집도 다니지 않는 아기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지지고 볶으며 완전히 소진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요. 어쩌면 글을 쓸 시간과 체력이 하나도 없다는 건, 그만큼 육아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연재를 약속해 놓고, 제시간에 하지 못하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글도 중요하지만, 지금 저에겐 육아가 더 중요한 일이기에, 정확한 날짜에 글을 올리진 못하더라도 여유가 생길 때마다 찾아뵙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따뜻한 댓글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