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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159일] 엄마가 되어간다

싫었던 엄마가 되어간다

by 연유

우리 엄마는 검소하시다. 나에게, 언니에게, 아빠에게 쓰는 돈은 아끼지 않는데 정작 본인에게 쓰는 돈을 그렇게 아끼신다. 화장품도 5천 원짜리 수분크림, 만 원짜리 영양크림만 고집하신다. 난 그게 불만이었다.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닌데 속상했다. 엄마가 설화수 화장품을 썼으면 했다.


하루는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의 목소리엔 화가 가득했다.

"오늘 엄마랑 동네 시장에 갔다? 바나나 한송이에 4천 원인 거야. 근데 엄마가 3천 원이었는데 올랐다면서 안 사시더라? 너도 알잖아. 울 엄마 아침마다 바나나 갈아 마시면서 맛있다고 소녀처럼 좋아하시는 거. 내가 사준다고 해도 절대 안 사시는 거야. 근데 다음 날 또 장 보러 갔거든? 이번엔 3천 원이라서 내가 얼른 사라고 집었어. 그랬더니 원래 바나나보다 작다면서도 또 안 사셔... 그냥 당분간 바나나쥬스 안 먹으면 된대... 나 화나!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엄마를 볼 때마다 너무 화나!"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10년 넘게 자취했고 아끼지 않았다. 특히 사 먹는 게 습관이었다. 아침마다 빵, 커피(-10,000원) 퇴근 후 배달음식(-20,000원). 혼자 먹는 한 끼에 3,4만 원짜리 회도 잘 시켜 먹었다. 하루 식비에 3만 원 이상씩 쓴 셈이다. 주말엔 친구를 만나 맛집 + 카페 코스로 돈을 썼다. 주기적으로 마켓컬리를 눈팅하며 핫한 간식을 시켰다. 한 달에 먹는 걸로 100만 원 가까이 쓰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랑 통화하면 내 목소리가 피곤해 보인다며,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작게는 5만 원 많게는 10만 원, 20만 원씩 보내주시곤 했다. 먹는 것에 아무렇지 않게 돈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결혼하고 가계부 쓰기를 시작했다. 저축도, 공과금도, 병원비도, 육아용품도 다 마땅히 써야하는 돈이었다. 줄일 수 있는 건 식비밖에 없었다. 마침 결혼하며 시골로 이사 와서 배달시킬 곳이 마땅치도 않았다.

덕분에 장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식재료 물가를 전혀 몰랐다. 사봤자 밀키트만 사 먹어봤기 때문에. 어라? 돼지고기 100g에 1500원? 외식하면 180g에 18000원이니까 100g에 10000원이었는데? 물론 쌈장, 상추 다 사야 하고 내가 설거지까지 해야 하지만 그래도 반의 반값도 안되잖아? 같은 가격에 좋은 재료를 양껏 먹을 수 있다니. 이게 사 먹는 맛이구나. 우리 동네에 홈플러스 온라인 주문이 가능해지며 장보기는 수월해졌다.


계속 장을 보았다. 어느덧 식자재 가격에 감이 생겼다. 나름의 적정선이 생겼달까. 그러나 식재료값은 그때그때 달라졌다. 특히 과일, 야채가격은 수시로 변했다. 배추 한 통에 만원이라 올해 김장할 수 없다는 기사를 보고, 가짜 뉴스처럼 느껴졌는데 정말 그즈음 배춧값이 금값이었다. 그럼 배추 전은 나중에 해먹어야지 싶었다. 990원이었던 애호박은 일주일 사이에 3,500원까지 올랐다. 저녁 반찬에서 애호박 전은 빼기로 한다. 취나물을 좋아하지만 제일 할인하는 이름 모를 나물을 사서 무쳐먹었다. 가장 싼 게 제철 식재료 아닐까 생각 또는 위로하면서.


어느 날이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바나나 스무디에 꽂혔었다. 그해 여름 바나나+우유+얼음을 넣고 싹싹 갈아 마시면 세상을 가진 듯 행복했다. 출산 전 마지막 만찬으로 바나나스무디를 먹었을 정도다. 출산하고 한동안 시들했던 바나나스무디가 요즘 다시 당겼고, 한겨울에도 얼음을 가득 넣어 갈아 마셨다. 이가 시려도 맛있었다. 육아하면 땀이 나서 한겨울도 한여름같다.


오늘도 홈플러스 장바구니에 바나나를 담았다. 한송이에 4000원. 후기까지 꼼꼼히 살핀다. 후기사진을 보니 바나나가 6개밖에 없다. 어라? 동네 마트에서는 한송이에 10개는 넘었고 거기도 4000원이었는데? 나는 어플을 끄고 자연스럽게 장바구니를 들고 외출준비를 했다. 이불속에 있던 남편이 물었다.


"오늘 눈보라 치는데 어딜 나가?"

"바나나 사러. 얼른 다녀올게"

"엥? 그냥 홈플러스에서 시켜"

"안 돼~ 거기 바나나는 크기도 작고 개수도 적어"

"거기 바나나 당도가 더 높나 보지. 시켜 먹자"

"..."

"오늘 길이 얼어서 마트까지 운전하기도 힘들 텐데 가지 마"

"음... 그럼 그냥 다음에 먹어야겠다"

"다음에? 자기 바나나스무디 좋아하잖아. 왜 그래? "


왜 그러냐고? 왜? 왜?

나는 비싼 바나나는 먹기 싫었다. 비싸서 못 먹겠다.


이럴수가, 엄마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 그 때 엄마도 지금 내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 아이도 이런 내 모습을 속상해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싫었던 엄마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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