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을 마주하는 두려움
머리가 한 움큼 빠졌다. 진상 스트레스로 제대로 못 잤다. 여전히 원재와는 부부로 지내고 있다. 둘이 마주 보고 으르렁 거릴 때도 있지만, 어깨동무를 하는 때도 있다. 원재는 고객 때문에 화가 끝까지 났었다.
"리뷰 써주신다고 하고 서비스받으셨잖아요. 제 돈 들여서 드린 겁니다."
"개인정보보호법 몰라요? 전화는 왜 하셨어요? 솔직히 그거 안 써도 상관없잖아요?"
보통 이상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공기가 주방에 번졌다. 원재는 화를 주체 못 하고 앓아누웠다. 기침을 하다가, 코를 풀다가, 귀가 안 들린다고 했다가, 다시 공황장애가 올 것 같이 하얗게 얼굴이 떴다.
"오빠, 오빠도 잘못했어. 그러게 전화는 왜 했어?"
"얄미워서 그랬다! 이놈의 장사, 우라질, 못해먹겠다."
둘 다 각자의 우울한 기운으로 억지로 일하고 있었다. 마칠 때가 다되어서 배달 앱 고객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고객도 잘한 건 없지 않나요?"
고객님과 점주님의 잘잘못을 따질 건 아니고요, 고객의 전화번호를 저장한 게 맞으신가요, 네, 고객과 정확하게 어떤 일이 있으셨나요, 고객에게 보내신 문자 내용은 별것 없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만, 사실인가요, 네,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서, 한번 더 이런 일이 있으시면 퇴점하셔야 합니다. 고객이 신고한 건 아니고요, 검토 중에 발견했습니다만, 서약서를 받는 게 원칙입니다만, 저장되어 있는 메일로 보내드리고요, 수기로 작성하셔야 하고, 프린트가 없으면, 기일 내에 답변 주셔야 합니다.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먹는 사람이 있고, 먹는 사람이 있으면 치우는 사람이 있다. 치우는 사람이 있으면 버리는 사람이 있고,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쌓는 사람이 있다. 연결된 동작을 두 사람이 한다는 건, 순서에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일이다.
긴 반성문을 쓰면서 생각했다. 이건 내 인생을 반성하라는 뜻이다. '다신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번 더 걸리면, 당신이 나가라면 나갈게요.' 혐오스러운 상황을 한자어로 나열했다. 흐린 글씨를 따라 썼다.
"이거 이름만 서약이지, 반성문이야. 끝났어. 이제 그만해, 제발."
"과연 그 여자가 여기서 끝낼까?"
"지금도 충분히 타격 있는데, 여기서 더?"
"죽여버리고 싶다."
원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원재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결국 손해는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대가리를 박는다. 그런다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심지어 '이긴다'는 건 술자리에서 안주로 나올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이득이 없다. 정말, 이럴 때마다, 눈물보다 더 빠르게 나오는 이혼생각이다.
은상언니를 떠올렸다.
호계와 헤어진 후로 1)*오랜만에 만난 은상 언니의 안색은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밝아졌고, 무엇보다 한결 생기 있었다. 눈동자가 말하게 빛났고 눈매와 입매는 뭐랄까, 편안하고 개운해 보였다. 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피부가 몰라보게 반질반질해져 있었다.
은상 언니가 소주잔에 민트 초코맛이 나는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우리 애인이 민트 초코를 그렇게 좋아해. 권해서 먹어보고는, '좌절맛'같지 않았겠니. 이 사람은 무슨 힘든 일이 있어서, 이걸 돈 주고 사 먹을까?"
"좌절 맛? 언니는 그럼 행복맛은 뭔데요?"
"글쎄, 단짠맵 아닐까?"
"으음, 흥미롭다. 행복은 패스트푸드 인스턴트 친구구만. 아주 건강에 나쁘겠어. 푸하하"
은상언니와 동갑인 미용실 사장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는 양 씨인 미용실 언니에게 양대표라고 불렀다. 양대표언니의 농담의 중심에는 늘 사랑이 있다. 은상언니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사랑'이 있다고 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다. 우리 가게에 밥을 사러 왔다가, 혼자 소주 마시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레 동승했다. 그러다 미용실에서도 마시고, 동갑인 은상언니랑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동네 친구가 되었다. 알기 전에는 몰랐다. 이제는 동네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 남편이 전과자라고, 사람을 죽여서 감옥에서 오랫동안 수감 중이라는 사람도 있고, 미혼모로 아이를 키웠다는 사람도 있었고, 전남편의 아이라는 말도 있었다. 사실이어도 상관없다. 믿음은 소문처럼 어차피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행복이 건강하면 불공평하잖아. 기브 앤 테이크가 돼야지. 나처럼."
"에이, 그래도 기브 앤 테이크는 너무 했다. 그럼 나 행복 안 할래."
"아냐, 정말이야. 호계랑 헤어지고 한동안 힘들었어. 아들 둘이서 치를 떨면서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이사까지 갔지 않겠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비 오는 날마다 생각나더라. 다른 여자랑 바람피운 것도, 자식만 한 여자랑 붙어먹은 것도 맞고 사실이잖아. 근데 내가 제일 화나는 건 나였어. 미운데 자꾸 보고 싶더라고. 우린 스무 살 때 만났고, 서로 첫사랑이었잖니. 자꾸 무너졌어, 내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어. 버스에서 엉엉 울었지 않겠니. 그때 애인이 민트 초코를 하나 건네더라고. 그날 바로 불붙었지."
"어우, 야해. 언니는 무슨 결말이 그래요?"
"선아야, 걱정 마. 아직은 남자 맛을 잃은 장금이 아니겠니? 난 이제 민트 초코가 제일 좋아. 좌절맛에서 행복맛으로 가는 중이거든."
"짜릿하고 좋구먼. 잘했어 오은상!"
"고마워, 양대표! 선아 빼고 우리 둘이 러브샷 하자!"
둘의 알 수 없는 끈끈함, 어렵고 힘들었던 과정보다도 '혼자는 승리'라는 결론만 보고 있었다. 진급 못해서 불안한 사람처럼 그들이 부러웠다. 한 사람의 빨래와 밥이 줄었을 테다. 걱정도 반으로 줄었을 테다.
"선아야, 난 사실 의외였어. 너 이혼할 줄 알았어. 너 명심해라. 나처럼 헌신하면 헌신짝 되는 거야. 근데 원재는 조금이라도 달라졌어?"
"아뇨. 전혀요. 한 달 했음 오래 했죠. 양심이 없죠. 그런데, 저도 뭐. 부부는 쌍방이잖아요."
"남편 욕이라도 해줘 봐. 오랜만에 남의 남편 이야기 좀 듣고 싶다."
"언니, 옷 챙겨 왔어요? 3박 4일은 걸릴 거 같은데!"
웃음으로 무마, 남편의 흉을 본다는 게 결국 즐겁지 않다는 걸 안다. 민트 초코남을 만나기 전 은상언니는 울보였다. 한잔하고 헤어지며, 가는 길에 '개 같은 인생'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울었다. 잃은 감정을 잃지 못하고, 잊은 감정을 잊지 못했다. 언니가 넘어져도 창밖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삶을 눈물로 씻어내고 있었다.
'넌 참, 균형 감각이 없는 것 같아.' 원재가 내게 했던 최악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했을 때에 원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뜻이, 내가 한 말이, 자기가 한 말이, 그게 뭐가 뭔지. 그냥 뱉은 말이었다. 알면서도 기분이 싸했다. 나는 원재를 미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스스로 내린 답을 믿지 못했다. 그 답이 줄 미래도 믿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진심으로 미워하게 되면, 식인종과 같은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2)* "뭐랄까, 사실 그건 주문 같은 거였어. 그냥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될 거라고 믿어야만 했어. 잘되지 않을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도 한쪽으로는 늘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어. 그래서 문득문득, 찌르듯 괴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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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달까지 가자 오마주 (장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