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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버리기 위한 플랫화이트 커피와 베이글

매일 마시던 커피 한 잔의 당연함도 현실에서 누려지는 여유였다.

by O Ri 작가



오랜만이었다. 피곤해서 두 눈을 감아도 잠이 들지 않는 새벽이 한 달 넘게 이어져 왔다. 그런데 어제와

엊그제 주말은 오랜만에 정말 깊게도 잠들었다. 두 눈이 떠지는 게 싫고 무거울 정도로 깊게 잤다.


때로는 피곤함도 잠드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피곤함 때문에 잠들 수 없는 일상은 그냥 견디는 하루하루였다. 그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고 나서 눕힌 나의 깊은 잠은 한 달이 넘은 후에야 느끼는 절박한 충전이었다.





하루하루를 당연한 듯 걷는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바라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인생에 던져진 그런 우리의 일상이 어떤 모습으로든, 어떤 숨결로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삶 그자체다.

무너지기도, 쓰러지기도 쉽지 않은 살아 있음이다.








예측할 수 없는 하루 하루를 사는 느낌이다.


아이를 등교 시키고 오랜만에 겨우 펴고 앉은 노트북 옆, 따스한 플랫화이트 커피랑

바질 토마토 베이글 한 조각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다. 시간을 때우며 빈 속을 채워 보기 위함이다.


의외로 포근한 주말을 버텨 내고 차가워진 길거리의 바람을 피해 들어 온 카페의 온기는 따스하다.

또 다시 시작된 한 주의 첫 날을 버티려고 주문한 커피 한 잔에 나는, 하루의 두 세 시간을 버리고 있다.

길거리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망설이다 질러진 계산과 많은 생각 속에 결제한 13,000원의 버림이다. 그 버림 덕분에 나는 하루의 두 세 시간을 카페의 온기 속에서 겨울 한 켠을 버티고 있다.





내가 하루에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시간은 고작 한 두 시간이다. 그 한 두 시간을 빼앗겼던 한동안의 일상에

여유란 없었다. 피곤함과 더불어 내몰아지고 몰아쳐지는 휘청이는 발걸음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새, 내가 사람으로서 일상의 순간을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는 걸 깨달았다. 내 손바닥 크기 보다도 작은 잔 안에 담긴 여유의 순간이 언제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함이 아닐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느 순간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시기가

닥칠 수도 있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한 조각이다.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의 한 두 시간 뿐인 그 순간을 함께한 커피 한 잔도 현실적인 여유 없이는

가질 수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내가 매일을 걸어가고, 매일 속에서 찾고 있는 소소한 순간들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면 안되었다. 항상 가져지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누릴 수 없고, 잃을 수도 있는 순간의 한 잔 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습관처럼 아무 생각없이 매일 마시는 커피 속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내가 그래도 이 정도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거라는 현실이 살아 있다.


그래도 나라는 한 인간이 무너지지 않고, 아직은 쓰러지지 않고 살아 있는 증거다.







어떻게 이사를 나오고, 어떻게 한숨 돌렸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주일이었다.


하루의 네 시간을 마감하고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걸어 들어가는 밤길이 쌀쌀했다. 그 길거리 위에서 가로등 보다 더 따스하고 환하게 나를 비춰주는 건 노랗게, 빨갛게 매달려 있는 단풍들이었다. 나뭇가지들 사이를

풍성하게 매우고있는, 어느 새 우리의 몸 안을 파고드는 시린 겨울 바람에 떨어지고 있는 단풍들이었다.




한숨 돌리고 나면 또 다시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를 겨울의 시작에서 맞이하고 있다.


나의 머리 위를 덮어 주고 있는 노랗고, 빨갛고, 색이 바래가는 연두빛의 단풍들이 가로등 보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시린 11월이다. 그 시린 11월 속에서 내가 멍하게 깨달은 건 '그래도 살아지네. '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인간으로 내던져진 나의 일상이었다.


이렇게 버티면, 이렇게 살아지는 거라면 이 고비의 끝에 희망이 있기를 바랬던 처음과는 다르다.

버겁게 버텨지고, 견뎌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짜 희망이 있긴 있는 거야? 뭔가 있으니까 쓰러질 거 같은 이 몸으로 살고 있는 게 맞아?"란 의문이 된다.

점점 쳐지는 두 어깨를 감당해야 하는 게

인간의 자존감인 거다.


그 자존감에서 답을 다시 찾아내야 하는 것 또한 내 숙제다. 그 자존감에 대한 숙제를 풀어내야 하는 중심에 내가 있다. 그 중심인 나에게 운이 따라 줄지는 하늘의 숙제다.


내가 마흔 후반까지 살아오면서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운의 흐름과 길은 결국 하늘에 달렸다는 것을,

그 운의 흐름이 나의 길을 터 주기 위해서는 누가 알아 주든 알아 주지 않든 포기하지 않는 독한 깡을

일단 부여잡고 있어야 한다.

내가 부여 잡고 있는 게 결국 희망이고 운이었는지,아닌지를

언제 알게 될지는 모른다.


어느 순간 알아지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 알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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