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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Again 3화

모든 게 너무나도 철저히 준비된 거 같다.

by O Ri 작가




건식은 얼굴을 찡그리며 깨어났다.

상체만 벗겨진 건식, 하체에는 환자복 바지가 입혀진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건식의 한 쪽 팔에는 수액이 연결된 링거가 꽂혀 있다. 수액은 작은 바퀴가 달린 긴 수액 걸이에 걸려 있다.

닥터 블랙은 이제 막 건식의 옆구리를 다 꿰매고 마무리 중이다. 건식이 누워서 여기가 어딘지 살피듯 휘둘러본 뒤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닥터 블랙이 한 손으로 건식의 가슴을 눌러 제지한다. 고갯짓으로 옆에 개어 놓은 환자복 상의를 가리켰다.


“빨리 깨셨네요? 치료 끝나고 위에도 이거 입으세요. 입고 오신 옷은”


닥터 블랙은 벽에 붙은 전자시계를 시크하게 곁눈질로 힐끔 확인한다.


“가져간 지 40분 정도 됐으니 20분 정도 있으면 세탁에, 건조에, 다림질 잘 돼 있겠네요.”


닥터 블랙은 가위로 건식의 옆구리를 꿰매던 실 끝을 잘랐다. 건식은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얼굴을 찡그렸다. 신음 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다행히 비켜 갔네요? 무슨 소린지 잘 아시죠?”


건식은 피식 웃었다. 분명 대학병원 건물 후문에서 내렸다. 앞 차에서 건영이가 하율이를 업고 차에서 내려 대학병원 건물 후문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봤다. 거기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건식은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자신이 앉아 있는 네모난 공간을 그제야 천천히, 자세히 훑어봤다.

무슨 요양원에나 있는 지하 병실 같다. 15평 정도 되는 공간에 온 벽이 매끈한 은색으로 돼 있다. 너무나도 깔끔하다.

건식이 앉아 있는 병실 침대와 맞은 편에 보이는 수술대, 기본적인 수술까지 가능해 보이는 도구들이 담긴 2단 의료 트레이, 의료용 멸균 소독기, 천장에 LED 램프, 마취기, 환자 모니터, 로봇 수술 기계 같은 것도 설치돼 있다.

CCTV는 보이지 않는다. 수실 참관실도 없다. 출입문도 은색 철문으로 돼 있다. 기록도 안 남을 치료와 진료, 수술을 진행하는 곳 같다.


‘그렇다면 이 의사는?’


건식은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닥터 블랙을 조심히, 찬찬히 살폈다.


“땅 밑에 숨겨진 비밀 공간이라도 되나?”


닥터 블랙은 건식의 물음에 그저 태연하게 대답한다.


“병원이죠.”


닥터 블랙은 당연하다는 듯 들고 있던 붕대와 가위를 들어 보인다.


“그쪽은 칼 맞고 치료 받으러 온 환자고요. 물론 기록은 안 남을 겁니다. 이미 눈치채신 거 같고, 궁금한 게 많으시겠지만, 나중에 따님에게 들으시죠.”


닥터 블랙은 건식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옆구리를 붕대로 감아 줬다. 등받이가 없는 회전의자 위에 그대로 앉아 의자를 옆으로 움직이더니 작은 벨을 눌렀다.

은색 출입문이 조용히 미닫이로 열리더니 간호사복을 입은 청년, 무창이 들어 왔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으시면, 이 친구가 따님 있는 곳으로 모셔다드릴 겁니다.”


닥터 블랙은 능숙하고 시크하게 장갑을 벗더니 건식을 한 번 쳐다보고는 출입문 밖으로 사라졌다. 간호사복을 입은 무창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기다리겠다는 듯 말없이 서 있다.

건식은 무창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뭔가 물으려다 됐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환자복 상의를 집어 천천히 걸쳐 입는다. 링거가 꽂힌 팔 쪽이 걸린다. 건식이 무창을 쳐다보는데 재빠르게 다가와 링거 걸이에서 링거를 빼 들고 환자복 팔 쪽에 조심히 끼워 넣고 반대편으로 빼 준다.

건식이 환자복 단추를 다 잠그고 침대에서 내려가려는데 바닥에 얌전히 놓여 있는 삼선 슬리퍼에 무의식적으로 두 발을 끼워 넣었다. 사이즈가 딱 맞아 떨어졌다.

건식은 무심결에 발을 끼워 넣은 삼선 슬리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뭔가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도 철저하게 준비돼 있는 느낌이다.





지하 수술실 앞, 건영이 벽에 기대고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건식은 무창이 한 쪽 팔을 부축해 주고 대신 끌어주는 링거대 바퀴 소리와 함께 걸어갔다. 건영은 링거대 끌리는 소리에도 전혀 움직임이 없다. 건식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건식은 건영의 맞은편 의자에 앉혀졌다. 무창은 건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건식은 뒤벽에 머리와 상체를 기댔다.

건식은 건영을 쳐다본다. 분명히 집 앞에 기다렸다는 듯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건영은 한 치의 의심도 망설임도 없이 하율을 그 차의 뒷 자석에 눕혔다. 건식이 조수석에 타려고 차 문손잡이를 잡자, 건영이 재빠르게 제지했다.


“죄송한데 아빠는 뒤에 택시 타고 따라와 주세요.”


건영은 뒤에 깜빡이를 켜고 정차하고 있는 택시를 쳐다봤다. 건영은 그런 건식을 그대로 남겨 두고 조수석 차 문을 열고 빠르게 올라타 차 문을 닫았다. 건영이 차에 올라타자 차는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건식은 생각할 틈도 없이 뒤에 정차해 있는 택시에 재빨리 올라탔다. 올라타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묻지 못했는데, 택시 기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안다는 듯 건식이 타자마자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거요?”


택시 기사는 룸미러로 건식을 힐끔 쳐다봤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릴 테니까요.”


택시 기사도 대충은 무슨 일인지 아는 눈치였다. 문제는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건식도 모르게 마취제에 취해 의식을 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그렇데 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뒤에서 누군가 건식의 입에 약품이 묻은 천을 갖다 댄 기억이 전혀 없다. 대학병원 건물 후문 앞에 도착하는 걸 본 순간부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건식의 의식이 잠에 빠져들 듯 눈이 감기며 꺼져버린 거 같다.

이제야 찬찬히 생각해 봐도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건 건식뿐인 거 같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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