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명을 들은 그 순간, 공기
그날은, 조금 늦었다.
8개월 전에 정기검진을 받았다. 거기서 갑상선을 추적하라고 6개월 후에 찾아오라고 했는데 그보다 2개월이 늦었다. 셋째가 어린이집이 가기 싫다며 놀이터에서 살짝 버티는 바람에 병원에도 늦었다. 다행히 아이를 보내고 도착한 병원은 그리 북적하지 않았다. 거기 들어간 나는 그저 한가로운, 칠팔 층 되는 큰 병원 건물에 들어온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하러 온 것은 말 그대로 추적검사이니까, 초음파만 보면 되니까.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갔던 것보다 더 부담 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2층 대기실에는 때 이른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유방 갑상선 센터라 그런가 트리 색감도 은은한 분홍빛이구나.’ 여성 취향을 고려한 감성적인 핑크빛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고, 자연스레 크리스마스의 선물이, 그 기대감과 포근함이 떠올랐다.
노곤노곤함을 떠올리며 잠깐 지나간 시간을 헤아려봤다. 뭘 하다가 2개월이나 늦었지? 세 아이의 여름방학이 끝난 게 9월. 방학이 끝났으니 한숨을 돌릴 수 있어야 했는데 학원이라고는 가질 않는 아이들의 긴 방학을 정리하고 제자리를 찾기까지 조금 지쳤다. 방학이 끝나도 각기 다른 초등학교의 등교와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원, 하원, 간식과 끼니들을 챙기고 제각각인 아이들의 입맛과 성향을 맞춰 준비물을 미리 체크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무던히 소진되는 것이 싫어 시간을 쪼갰다. 아이들이 없는 낮에는 독서를 하고 가끔은 독서모임을 했다. 온라인에선 마케팅 선생님의 수업을 거들어주는 코치로서 n잡러로도 괜찮았다, 짬짬이 마케팅 공부를 하고 가끔은 새로운 사장님들을 만날 영업계획을 짜는 하루하루.
어쩌면 그대로만 흘러갔어도 괜찮았을까, 조금 벅차긴 했지만 열정으로 즐거움으로 벅찬 게 없었을 건데. 건강해지자는 지인의 꼬임에 빠져 클라이밍을 배우기 시작했다. 뭔가 더 건강해진 기분에 의욕이 솟고 열정이 넘치던 차, 10월. 엄마가 구급차를 타고 셀프 입원을 했다. 간병통합 서비스가 있는, 우리 집으로부터 버스 대여섯 정거장 거리의 병원에 엄마가 들어갔다.
꾸역꾸역 그 길을 오갔다. 엄마가 편하게 여기는 '착한 딸'이었으니까. 내 시간을 쪼개 쓰면서도 힘이 부치던 차에 화가 조금 솟구치기도 했다. 혼자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엄마가,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기에 열 중에 다섯여섯은 꾹 참을 게 훤히 보여서 2~3일에 한 번씩 들렀다. 간병인이 공동으로 있다 해도, 마음에 걸렸으니까. 클라이밍을 마치고 걸어갔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도 힘들고, n잡러로서 소진되기 싫었던 차에, 겨우 내 건강을 챙기겠노라 아주 작은 욕심을 냈는데 불쑥 '딸 역할'이 내게 무겁게 다가왔다. 겨우 버티고 버티던 내 평정심이 흐트러진 기분이었다. 즐겁고 신나게 끌어 오르던 그 찰나에 병원까지 오고 가면서 에너지가 동이 나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나는 행복하면 안 될까?' 하는 투정이 미어져 나오면서 2개월이 늦었다.
‘그래, 내 정기검진을 놓칠만했네.’
“… 떼어 놓고 가세요”
그날은, 갑상선 초음파를 보는 의사가 이상하게 바빴다. 목보다는 가슴과 겨드랑이를 한참을 챙겼다. 문지르다 말고 문지르다 말고 자꾸 기계의 버튼을 눌러가며 부분 부분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는 ‘총검술’이라고 탕-하고 조직을 조금 떼어가는 걸 하자고 했다.
총검술? 펜싱의 테크닉인가 싶게 낯선 그게 또 이상했다. 분명 별 거 아닌 검사라고 하면서 가슴과 등을 칭칭 동여 맨 압박붕대를 메어줬다. 3일씩이나 그대로 하고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검사인가. 갑갑하게 나를 묶은 그 상황이 버거웠다.
물 안에 들어가면 소리가 멍하게 들린다. 음파를 옮겨주던 매질로서 공기의 소중함을 우리는 그럴 때 느끼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렇다, 조금 멍한 느낌.
3일간의 붕대 숙성의 시간이 흐른 뒤에 들은 말이 그랬다, 비현실적 한 마디.
“침윤성 유관암이고요.” 고작 3일간 붕대만 감고 있으면 되는, 그 별 것 아닌 총검술 끝에 그 말이 따라왔다. 나의 것 같지 않은 낯선 단어들.
그러고 보니 결과가 나왔는데 꼭 들으러 오시라고, 보호자분은 같이 안 오시냐 전화를 줬던 간호사의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어쩌면 그게 힌트였는데 놀라지 말라는 배려였는데. 그 모든 말을 듣고도 나는 버텼다. 날카롭고 뾰족한 결과 대신 몽글몽글 평소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지... 나는 감기환자인양 부러 혼자 왔던 것 같다. 나는 늘 혼자 씩씩해 왔었으니까.
그렇게, 운명적인 진단 앞에.... 나는 멍하게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이 환자에게 측은함을 보내야 하나 냉정함을 보내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도 낯설었다. 그저 내가 이상한 나라에 온 사람이 된 기분. 조금은 먼 세계에 던져진 나 같은 기분.
멀리서 일렁일렁, 소리가 멀었다. 평소의 나를 감싸던 공기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