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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Aug 02. 2018

Sin Prisa, Sin Pausa

남해를 추억하며

남해 여행기 #2




 '오늘도 비가 오면 어쩌나-'


 그러면 다시 독일마을로 돌아가서 대낮부터 맥주나 실컷 마셔야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다행히도 남해의 둘째 날에는 축축하게 젖은 햇빛이 내렸다. 맑은 기운은 아주 이따금씩 짙은 구름을 간신히 뚫고 내려올 뿐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은 남해 서부, 육지의 끝자락에 위치한 다랭이 마을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남해의 아침

 

 바람에 잎이 쓸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이른 시간, 홀로 남해의 아침을 맞이하러 밖으로 나왔다. 조용히 움직이려 했건만 게스트 하우스의 마스코트였던 '한량'이가 결국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너무 일찍 깨워서 미안해' 전달되지 않는 말소리가 허공으로 퍼진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고 홀린 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이 작고 푸른 시골 마을의 아침 정취는 도시의 그것보다도 훨씬 고요하다. 밤 사이 비가 내렸는지 온 세상이 물을 머금었고 초록색의 모든 것들은 한 두 방울씩 물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되려 분위기는 무겁지 않고 가벼워서 익숙하지 않은 길로 상쾌한 걸음을 내딛는다.




 약간 두꺼운 'H'처럼 생긴 남해는 독일마을이 있는 이곳 삼동면, 그리고 미조도 등이 있는 동부와 다랭이 마을이 있는 서부로 나눌 수 있다. 독일마을이나 예술촌 등 인공적으로 만든 관광지가 있는 동쪽과는 또 다른 매력의 남해, 이곳의 '진짜 자연'을 느끼려면 서쪽으로 여행해봐야 한다는 말을 듣고 다랭이 마을을 목적지로 정했다. 남해는 대중교통이 다소 불편한 곳인데 고맙게도 숙소에서 다랭이 마을까지 직행하는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꽤 먼 거리를 차량으로 실어다 주었다. 여기까지 온 여행자가 이왕이면 남해를 제대로 보고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이 해안 도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분이었다. 어떤 여행은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끝내 완성되기도 한다.


다랭이 마을, 해안가로 내려가는 길


 군내버스를 타고 몇십 분을 달리니 온통 초록색인, 아기자기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자연이 거대한 마을에 도착했다. 남해 다랭이 마을이 CNN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 3위에 올랐다는데 과연 1, 2위는 어디일지 궁금해질 만큼 이곳의 경치는 장관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남해 바다와 그 위의 고고한 섬들을 보고 있자니 '한국에 이곳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관광지가 두 곳이나 더 있다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논이지만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거대한 초록빛 계단과 그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는 광활한 바다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다.


다랭이 마을 해안가

 

 다랭이 마을 꼭대기에서 물이 가까운 해안가까지 내려가는 거리가 꽤 멀어서, 다시 올라올 길을 생각하면 벌써 고생스러운 기분이 든다. 하지만 충분히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꼭대기에서 바라본 다랭이 마을의 잔잔했던 바다는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가 되어 위태로움을 자아내고 있었고, 강렬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은 잃지 않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아득한 거리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가까이 서면 위태로움을 지니고 있다'


 발아래가 훤히 보이는 다리를 지나 추락주의라는 표지판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다를 아무리 많이 봤다고 해도 결코 질리지 않는 풍경이 이곳에 있다. 어느덧 뜨거운 햇빛도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곳을 떠나라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젠장, 시간이 조금 지나니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랭이 마을에서 먹는 파전과 막걸리


 비가 오면 비를 즐기면 된다. 다랭이 마을 중턱에는 유명한 식당들이 몇 곳 있다. 나는 '유자 막걸리'의 원조라는 집에서 식사와 함께 비 오는 날의 마스코트 격인 파전에 막걸리를 먹었다. 이 먼 곳까지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계획에 없었던 낮술(feat. 피자 같은 해물 부추전)이라니, 왠지 여행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듯한 순간이지만 이런 점이 또 여행의 한 즐거움 아닐까?


 그래도 여행 중 대낮의 막걸리는 딱 한 병이면 족했다. 다시 비는 그쳤고 어느덧 돌아갈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마을 정상 부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가 버스를 기다렸다.


남해 다랭이 마을


 이런 구석진 곳에 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아서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저 멀리서 버스가 가파른 길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버스는 곧 멈춰 서서 손님을 기다리다가 이내 마을을 내려갔고 그 안에 나는 없었다. 조금 아슬하긴 하지만 다음 군내버스를 타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를 탈 수는 있었기에, 한 시간이라도 더 이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랭이 마을의 기분 좋은 공기 사이를 걸으면서, 또 남해가 얼마나 좋은 여행지가 되어주었는지를 되새기면서 그렇게 남해 여행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남해를 여행하면서 만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한 문장이 있다. 남해를 추억하며 물음을 건네본다. 바쁜 일상에 함몰되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너무 서두르고 있지는 않는지, 또 무엇보다 꾸준함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Sin Prisa, Sin Pausa.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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