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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Sep 03. 2018

에라, 여행이다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

서울 여행, 첫 번째 이야기




 집착하는 옛 연인처럼 몇 차례나 태풍이 지나가도 부단히 돌아오던 더위가 괴롭히던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기분은 좋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문자가 무료한 주말 오후를 깨웠다.


 '본선 진출 안내를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추가 자료는 이틀 뒤 자정까지 보내 주시고, (---) 본선은 여의도  ooo에서 진행됩니다.'


 얼마 전, 한 공모전의 예선에 참가했었는데 제출한 아이디어가 채택되었으니 본선의 프레젠테이션에 참가하라는 안내였다. 문자를 받은 날로부터 당장 5일 뒤에 여의도에서 본선이 있었고 이틀 내로 PPT자료를 완성해서 메일로 보내야 했다. 우리 팀의 자료가 경쟁을 뚫고 예선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본선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기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장에 빡빡한 일정이 몹시 피곤하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시상식 일정은 본선의 다음날로 잡혀 있어서 서울에 최소한 이틀은 머물러야 했다.

 

'작업도 막바지고, 스피킹 시험도 준비해야 하는데..'


 다른 할 일도 많다고 생각하니 짧은 프레젠테이션 한 번을 위해 부산에서 서울을 1박 2일로 다녀오는 일이 극도로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런 여비 지원도 없는 상황, 바쁘긴 매한가지인 팀원들도 막상 본선에 진출하자 처음엔 다소 혼란스러워했다. 금요일 이른 아침의 본선과 토요일 오후의 시상식으로 나뉘어서 잡힌 타임테이블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참가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었을까? 밤이 될 때쯤엔 어찌 되든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자는 대로 의견이 모였던 것은.


 어떻게든 본선은 다녀오기로 결심하니 동남아 여행을 다녀온 뒤로 마음에 품고 있었던 '서울 여행'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할 일은 산더미였고 당장 다음 주엔 또 나흘 동안 예비군 훈련에 참석해야 했기에 여행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가끔 숙제처럼 쌓여있는 일들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할 일이 쌓여 시간이 부족할수록 잠시라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기분!



 네 명으로 구성된 팀에는 나의 오랜 여행 메이트도 있었다. 본선 대회일과 줄곧 기대해온 기념일이 겹치는 바람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여자 친구에게 슬쩍 여행을 제안했다. 1000일을 기념하면서 의미 있는 공모전에도 참가하고 여행도 하면 일석이조 아니겠느냐는 말과 함께. 여름 내내 바다든 계곡이든 물놀이 한 번 못 갔다는 사실이 몹시 불만스러웠던 그녀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예정에 없던 여행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그녀 역시 일이 있었고 이틀짜리 일정을 나흘로 늘리기 위해서는 급하게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있어서 꽤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한 동력이다. 그녀는 결국 떠날 수 있게 됐고, 나에게 짧은 며칠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일을 하는 시간은 매우 집중력 있게 효율적으로 흘러갔다. 원고는 항상 최우선이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다만 공부 중인 시험과 서울에서 돌아온 뒤에 굉장히 무리하게 시작해야 하는 일정의 예비군 훈련은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끝까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여행에 무척 마음이 즐거웠다. 언젠가 '이러다 내일의 나는 X 되겠지. 하지만 X 되는 건 내일의 나지 오늘의 내가 아니야'라는 문구를 봤던 것 같다. 멋진 말이다.

 


서울 여행 첫 날, 영등포 타임 스퀘어



 진부한 말이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여행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생각만 해도 비효율적이고 피로하기 그지없었던 서울에서의 대회 참가는, 다소 무리를 한 끝에 여행으로 탈바꿈했다. 멀지 않은 날에 서울 여행을 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이렇게나마 다녀올 날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다녀온 후로는 고생길이 훤하지만.


서울 여행 첫 날, 여의도 한강 공원


 여행을 품고 사는 이에게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전히 품고 있는, 더 멀고 새로운 곳으로의 꿈들을 따라 떠날 순간도 언젠가는 문득 찾아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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