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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계절을 지나, 겨우!

[공연 리뷰] 홍콩무용단 대형 창작 무용극 '24절기'

by 유진

1. 아등바등 살아내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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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하고 나니, 어떻게 매일같이 6시 반에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눈을 뜰 때마다 몸이 아–주 무겁다. 정말, 내가 이렇게 납덩이 같았었나.


알람에 맞춰 여섯 시에 눈을 떠도, 몸은 자동으로 이불 속으로 스스륵 흘러 들어간다. 속으로 몇 번을 ‘조금만…’ 중얼거리며 왼편으로 다시 웅크렸다가, 이내 앞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가만히, 정말 잠이 오는지도 모른 채 가만 있다 보면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야지…”


말을 건네며 내 옆으로 파고드는 이가 있다. 익숙하게 오른편으로 자리를 내어주면, 들어온 이가 얼른 안기라는 듯 베개 위로, 내 머리 아래로 팔을 뻗어 금세 내 이마를 톡톡 두드린다. 작고 두터운 손 하나가 머리결에서 턱끝까지 톡톡, 얼굴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 품은, 이 세상에서 나만이 안겨들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내려갈 수 있는 만큼 깊게 내려갔다. 어머니의 목선 안으로 머리를 묻고 또 묻었다. 익숙한 손길이 머리결에서 턱끝까지 톡톡— 다정히 내 얼굴을 따라 내려왔다.


오뚝하게 튀어나온 코, 부루퉁한 입술까지 톡톡… 턱끝까지 다정한 노크가 이어진다. “내 딸…” 하는 작은 목소리가 그 손길과 함께 내려온다.


그 손끝을 기억한다. 기억하려 애쓴다. 기울어가는 시간 안에서도 이 순간이 있었다는 걸 꾸준히 스스로에게 알려줘야 한다. 생각해보라. 결국 언제라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아무리 열심히 살아낸다 해도, 나는 끝내 이 품 안의 시간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아등바등 살아봤자, 결국은 겨우 ‘고아’가 될 운명이 아닌가.


해결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언젠가 외로워질 것을 알기에, 부모는 늘 자식을 걱정한다. 그 마음이 바탕에 있으니, 잔소리의 외피를 쓴 질문들은 늘 다양한 얼굴로 찾아온다.


이건 했니, 저건 해야지… 이건 어때… 누구는 이렇다더라… 이런 여러 형태의 물음과 제안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결국 결론은 하나다.


‘가장 최악의 결말만 아니면 된다.’

‘네가 외롭지 않게 잘 살면 된다.’

— 그거 아니겠나.


그 애틋하고도 애써 감춰 둔 걱정을 떠올리면, 잘 들어야지 하면서도 막상 ‘한참 먼 일이지’ 하며, 괜히 섣부른 투정을 부릴 때가 있다.


부모의 작은 토닥임은 필시, 이별이 전제된 매일을 견디게 하는 위안이 된다. 다만, 마음이 한없이 노곤해지다가도 끝을 보면 이상하리만큼 애수로 기운다. 언덕 위에 털썩 주저앉아 드넓은 하늘 끝에 ‘우와’ 하고 기분이 솟다가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오른편엔 먹구름이 드리운 풍경이 확 끼얹어져 있다.


10월의 19일 오후 3시, 나는 비슷한 각도의 기분을 낯선 곳에서 느꼈다.


19일에는 홍콩무용단의 창작무용극 〈24절기〉를 보았다. 왜 이 작품을 택했을까. 포스터만 봐도, 이 공연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정성이 들어갔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몸으로 음악을 풀어내는 예술이라니. 불과 두세 번밖에 접하지 못했는데도, 어느새 이 장르가 다른 어떤 시청각 예술보다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단언컨대, 이 세계는 미적으로 관객에게 폭력적이고 잔혹하다. 나도 사람이고 저도 사람인데, 왜 이렇게 이질적이고 지나치게 아름다운 형태로 온 힘을 다해 나를 괴롭히는가. 19일의 무대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심하게 감동을 받았냐고? 글쎄, 어쩌면 그저 신체의 반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몸의 체온이 오르면, 죽을 만큼 억울하면, 몸은 땀을 내고 눈물 흘리지 않던가. 내 눈 안에 담긴 것이 지나칠 정도로 조화로워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건 통제할 수 있는 정도의 넘침이 아니었다.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초록빛 잎사귀를 닮은 천들이 흩날린다. 내 눈앞에서, 저 손 안에서. 모든 쓸모없는 저항을 내려놓고, 무용(無用)한 상태로 그저 거기 앉아, 뚫어지게 앞을 응시했다. 이불 속의 온기를 떠나 객석에 앉아 또 다른 품—계절의 품—안에 스스로를 가둬 둔 것이다.


2. 흐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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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조명 아래에 놓이는 순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날도 그랬다. 일곱 명의 무용수가 투명한 흰 옷자락에 몸을 감싸고 누워 있을 때, 가운데 홀로 서서 ‘사람’이 아닌 듯 무대 안으로 물러서던 이의 몸선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예악당의 무대가 그렇게 깊고 안쪽으로 길 줄은 몰랐다. 그가 서서히 원을 그리며 물러설 때, 끝도 없이 안쪽으로 길이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선으로 목과 손끝이 연결된 꼭두각시처럼, 어딘가 영혼을 의탁해 둔 채 그저 원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이처럼, 불규칙한 선을 그리며 삐그덕거리다가도 그는 유순한 손짓으로 천을 모아가며 뒤로 물러섰다.


그 안의 실루엣은 보이는데 발동작은 감춰져 있어 더욱 기묘했다. 그 순간, 오늘 보게 될 풍경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풍경’, 절기 그 자체임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럼에도 나와 그들은 조금은 닮아 있었다. 보통 무용수라 하면 나보다 훨씬 압도적인 신장으로 ‘와, 저 사람은 다른 세계의 존재다’ 싶었지만, 홍콩무용단은 발레에서 봤던 이들보다 조금 더 가까운 눈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피부와 머릿결도 비슷했다.


다만 그 손끝에서 우리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계절을 예술로 표현한다는 건 익숙한 일일지 몰라도, 그날의 홍콩무용단은 계절을 두 손 위에 고이 모시듯 자신을 ‘정령’으로 변주해냈다.

동작이 매우 유려하고, 재간스럽다. 절제된 형식 안에서 표현을 억누르기보다 부끄럼 없이 팔을 뻗으며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는다.


표정에는 늘 은은한 미소가 깔려 있다. 바람결과 나뭇잎을 닮아야 하는 순간엔 자잘하게 흩날리며 있는 그대로를 아낌없이 드러낸다.


그 자유분방함만 보면 인간적인데, 비정렬된 각도 안에서 펼쳐지는 정렬된 동작에서는 오히려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서로 다른 위치를 오가며 동작이 교차해도, 상체는 미동이 없고 저 알 수 없는 눈짓 속 웃음에는 일관된 질서가 있다. 원을 그릴 때는 한 번의 뒤틀림도, 지체도 없이 감독의 지시를 그대로 옮겨내는 듯했다. 그 정밀한 선 위로 시선이 내리꽂혔다.


무용을 본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몸을 똑바로 바라볼 ‘권리’를 받는 일이 아니겠는가. 조명 아래의 실루엣을 응시하는 순간, ‘몸’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나 불필요한 잡념이 사라지고, 오로지 육체의 움직임 그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우리가 언제, 누군가의 몸을 이렇게까지 응시할 수 있던가.


저들의 춤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보면, 육체 안의 자아는 서서히 지워지고 남는 것은 오직 동작과 껍데기뿐이다.


“갈비뼈가 저렇게 생겼구나, 팔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새삼 알게 된다. 사람의 몸이란, 저렇게 생긴 것이었구나.


3. 무용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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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을 본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바뀌는가? 글쎄. 그들이 내 인생을 바꿔주는 것도 아니다. 공연이 끝난 뒤, 그 손짓을 따라 어떤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삶을 잠시 멈춘다. 멈춰서서 자꾸 뭔가를 바라보게 만든다. 지나치던 것들에 시선이 닿게 하고, 평소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손끝과 발끝의 마음에까지 신경이 쓰이게 만든다.


왜 홍콩무용단의 〈24절기〉가 보고 싶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네 계절을 표현해준다고 했으니까. 예쁘게 초록 천을 흔들어줄 거라 했으니까. 네 번의 계절을 속편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나의 이 거대한 바람을 이뤄주었을까? 응, '그리하였다'고 전하고 싶다.


그야말로 계절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그저 받아들이는 대신, 지나온 봄과 여름을 내가 직접 불러들이는 시간. 내가 아는 봄은 벚꽃뿐이었는데, 그들은 온몸을 뒹굴며 백색의 봄을 내 앞에 고이 펼쳐 놓았다.


만물이 땅에서 위로 피어오르고, 바람이 오가며 자유롭게 뒤섞이는 시간. 여름은 곡식을 손에 쥔 채 아스라한 먼 땅을 응시하는 계절이고, 가을과 겨울은 검은 옷자락으로 질서 있게 공간을 사로잡으며, 하얗게 되감기듯 길게 사라지는 계절이었다.


〈24절기〉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단 한순간도 놓치지 말라는 듯 긴 응시를 요구했다. 눈을 뗄 수 있는 구간이 단 하나도 없었다. 달뜬 환희보다 애수 어린 아득함이 깃든 동양의 선율 안에서, 생김새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퍽 나와 닮은 사람들이 온 마음으로 춤을 춰주었다.


너무 예쁘다. 예쁜 사람들. 참 예쁘다.


4.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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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 관객과의 대화까지 참여한 뒤, 1층으로 내려와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포토월 앞에서 방금 무대 위에 있던 무용수 한 분이 지인과 사진을 찍고 계셨다. 워낙 인상 깊은 장면을 보여주신 분이라,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您剛才是在台上表演的舞者嗎? 如果是的話,我想對您說:您的舞蹈非常精彩!"


빈약한 언어 실력으로 이 날의 무대에 대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나름 절반쯤은 내향인이기에 남몰래 눈짓만 남겨둔 채 예악당을 빠져나왔다. 오후에는 바로 앞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관람할 공연도 예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연이 앞뒤로 겹친 하루였다.


〈24절기〉를 통해 나는 어떤 ‘경칩’을 통과해 이 계절에 도달했을까.


사실 너무 몰입한 탓에, 계절과 계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작과 세밀한 표정들, 다채로운 색감에 한참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차라리 오늘의 절기가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 생각해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 며칠, 문득 날이 추워지지 않았던가.


검색해 보니, 지금은 상강(霜降) 무렵이란다. 뜨거움이 식고 차가움이 스며드는 경계, 계절이 미묘하게 걸쳐 있는 시간. 벌써 그리도 많이 지나왔구나.


이러다 금세 겨울이 올 것 같지만, 아직 붉은 단풍 하나 보지 못했으니 실감이 덜하다. 그래도 흘러갈 것은 흘러가겠지. 시간은 언제나 자기 속도로 지나간다.


이럴 땐 그냥 이불 속에 파고들고 싶다. 오늘도 늦게 들어가겠지만, 공연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도 6시 30분이면 또 몸의 무게를 느끼겠지. 그래도, 결국은 또 일어나겠지.


근데 말이지, 조금만 빨리 일어날 수는 없으려나?

…겨우 이런 생각이나 하는 중.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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