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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Mar 18. 2024

<서평> 일본 저널리즘으로 본 한국 저널리즘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객관보도주의, 출입처주의, 불편부당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복잡해 고민할 때, 흔히 하고 듣는 말이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라는 것이다.

미디어라고 예외는 아니다. 상업화와 선정성, 인터넷과 에스앤에스(SNS)의 범람, 당파적 보도와 미디어의 당파 도구화 등등. 지금 당면한 한국 저널리즘의 문제를 늘어놓자면 한이 없을 정도다. 이때도 역시 답을 찾아야 한다면, '기본'으로 돌아가서 궁구하는 일이 기본일 것이다.

저널리즘의 기본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있다면, 미국 언론인이 펴낸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언론진흥재단, 빌 코바치·톰 로젠스틸 지음, 2021년 12월 개정 4판)이다. 한국 사람이 쓴 책 중에서는 아직 이 정도의 탄탄한 저널리즘 교과서를 찾기 어렵다. 일본은 어떤가? 

그때 생각난 책이 <저널리즘의 사상>(이와나미신서, 하라 도시오 지음, 1997년 4월)이다. 도쿄 특파원 시절에 사서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책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널리즘이 가야 할 방향을 튼튼한 현장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제시한 인상적인 책이라는 기억은 생생했다. 생각난 김에 책장을 뒤져봤더니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어 있는 있는 빨간 표지의 문고본을 찾을 수 있었다.

읽어 보니, 지금 한국 저널리즘 상황과 관련해 배울 점이 의외로 많았다. 그 이유로 우선, 역사적으로 한국의 저널리즘이 일본 저널리즘을 수입하고 모방하면서 시작한 면이 크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요즘은 일본에서 탈피해 미국 것이 많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 저널리즘의 밑바탕에는 아직  일본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용어부터 관행, 출입처 제도와 편집국 조직까지 곳곳에 일본 흔적이 배어 있다.

저자인 하라 도시오(1925~2017)가 일본의 저널리즘계가 배출한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하라는 <교도통신>에서 사회부 기자, 방콕 특파원, 외신부장, 편집국장을 거쳐 교도통신 사장까지 역임한 골수 언론인이다. 1992년 퇴직한 뒤는 신문·방송계에서 저널리즘과 관련한 활발한 의견 개진 활동을 했다. 2007년에는 '탁월한 견식과 의견을 겸비한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인'인 그를 <NHK> 회장 후보로 추대하는 자발적인  시민운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일본 저널리즘계에서 차지했던 그에 대한 평가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라는 이 책에서 '뉴스의 선택은 올바른가', '표현 방법은 괜찮은가', '취재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은 유지되고 있는가' 등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오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던진다. 한마디로 신문과 방송은 어떤 사상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깊게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가 객관보도의 폐해를 지적한 부분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일본에서 정론(政論) 신문 시대, 즉 정치적 주장을 담은 신문 시대가 끝난 메이지 말부터 객관보도를 뜻하는 '불편부당'과 '정치적 공평'이란 개념이 신문에 도입됐다. 이것은 신문이 대중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서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불편부당'은 한국의 신문에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시 중의 하나인데,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에 따르면, 불편부당을 신문에 강령으로 명문화한 최초의 신문은 1918년 <아사히신문>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 신문들이 너도나도 불편부당과 정치적 공평을  편집 강령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그는 불편부당과 공정보다 다양성을 가장 강조해야 할 원칙으로 제시한다. '진실을 구해 다각적으로 취재 보도하고, 항상 소수파의 움직임과 의견도 저널리즘은 반영해야 한다'라는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불편부당과 공평은 저널리즘의 목적인 진실 추구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불편부당과 공평이 최종 목표인 것처럼 내세우면, 저널리즘이 성립할 수 없다. 특히 공평은 어디까지나 수법일 뿐이어서 공평의 문을 열어젖히고 넘어서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저널리즘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라면서 공평보다 공정을 앞세울 것을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객관보도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철저하게 객관보도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객관보도는 진실에 가깝게 갈 가능성을 높이는 유력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객관보도라고 하지만, 보도 대상의 선택, 시점의 선택, 표현의 선택, 크기의 선택에서 이미 주관이 개입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객관보도주의의 문제점은 기자클럽을 무대로 일상화하고 있는 제 관청을 중심으로 한 발표와 정치가의 발언이,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그대로 보도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즉 객관보도주의의 이름 아래 신문과 방송이 관청과 정치인의 선전도구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마치 한국의 관청 출입처 기자와 정치부 기자들을 염두에 둔 발언처럼 들린다. 그는 사실 보도, 객관 보도는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수단일 뿐이지 목표는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렇다고 그가 사실 보도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안으로 출입처와 권력자의 입에만 의존하지 않고 수용자의 입장을 반영해 전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객관보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귀 기울일 만한 얘기다.

그는 선거 보도에 관해 "정치보도에서 중시해야 할 것은 정치가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뿐이 아니고 민중이 정치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전해 그것으로 정치를 압박하는 것이 아닌가. 정치 정보만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취급하는 않는 것은 저널리즘으로서 편중돼 있다. 기자클럽은 관청, 대 정당, 재계에 너무 기울어져 있다"라고 지적한다. 지금 한국의 정치 보도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는 일본의 기자들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한 심의위원회 멤버로 참여하는 것도 강하게 비판한다. 정부의 심의위원회는 이미 결론을 정해 놓은 채 각계에서 위원을 초빙하는 형식을 빌려 그 결론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자와 미디어 회사들이 그런 의도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기자가 정보를 얻으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얻어야 하지 위원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는 것은 권력을 견제하는 저널리즘 정신에 맞지 않다는 얘기다.

그가 제안 중 논쟁적인 것은, 사설의 기명화다. 논설위원이 선거로 뽑힌 회사의 대표도 아닌데 그들이 회사의 논리를 대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주의 생각을 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기보다는 아예 논설위원이 기명으로 사설을 집필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다. 미국도 여전히 사설은 익명으로 쓰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다. 한 번 진지하게 논의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셔널리즘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제에도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보도를 하는 데서 일본보다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한국 저널리즘계가 참고할 점이 많다. 그는 결론적으로 "저널리즘에서 적은 언론·보도를 탄압하는 자, '진실의 보도'를 저해하는 자뿐"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스트에게 국적은 '픽션'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는 "기자가 되고 나서 '우리나라'라는 말을 사용하는 않기로 했다. 그것은 1945년까지 편협한 애국심을 강하게 가졌던 경험에서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내셔널리즘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고 자신의 내셔널리즘 극복을 위한 노력도 피력했다. '바이든-날리면' 파동으로 정부가 난리를 치는 광경과 하라의 얘기를 비교해 보면서, 한국 저널리즘계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고 험하다는 걸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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