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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May 06. 2024

<서평> 엘리트 중심 전통 저널리즘에 대한 사망선고

저널리즘 선언, 한국 저널리즘, 기레기, 국경없는기자회, 언론자유지수

매년 5월 3일은 '세계 언론자유의 날(World Press Freedom Day)'이다. 유엔이 1993년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총회 결의로 국제기념일로 지정했다.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신문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 대한 정부의 억압으로 언론의 독립성이 위협받고 있으며,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생명마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한 취지다.


국제 엔지오인 '국경 없는 기자회'는 매년 이날, 각국의 언론자유 지수를 발표한다. 한국은 올해 발표된 언론자유 지수 순위에서 180개 중 62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47위에서 15단계나 추락했다. 지난해엔 4단계 후퇴하는 데 그쳤지만 올해는 현기증 날 정도로 급전직하했다. 윤석열 정권 들어선 뒤 정권에 비판적인 미디어와 기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고 겁박해온 점을 생각하면, 놀랍지 않은 결과다. 윤 대통령이 4월 29일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양자 회담에서 그동안 펴온 억압적인 언론정책을 그대로 고수할 뜻을 밝혔으니 내년에도 크게 지수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이끄는 한국은 그렇다고 해도, 세계적으로도 언론 상황은 후퇴하고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순위를 구성하는 5가지 기준 중 정치적 배경에 관한 지표가 세계적으로 악화했다고 지적했다. 또 국제사회에서 언론인을 보호할 정치적 의사가 결여돼 있다고 말했다.


더욱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을 덕목으로 하는 언론의 자유는 더욱 커지고 보호되어야 한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게걸스럽게 마음껏 욕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방치된 약육강식의 세계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저널리즘이 존재하는 이유를 나 나름대로 쉽게 정리해 말하자면, 강한 자의 횡포를 막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 '억강부약'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런데 저널리즘의 위기가 꼭 정치권력 등 저널리즘의 바깥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외부 못지않게 저널리즘 안에서 스스로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과 위기를 키우는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즉, 저널리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수용자로부터 불신 받고 버림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널리즘 선언>(오월의봄, 바비 젤리저·파블로 J. 보즈코브스키·크리스 W. 앤더슨 지음, 신우열·김창욱 옮김, 2023년 5월)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입각한 전통 저널리즘이 왜 존립 위기에 빠졌는가를 분석하고, 저널리즘이 재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제언하는 소책자다. 이를테면, 저널리즘의 문제를 저널리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바라보고 분석하고 제언하는 내용의 선언서다.


공동 저자로 나선 미국과 영국의 저명한 언론학자 3명은,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붕괴와 작동 불능의 원인을 세 가지 면에서 살폈다.


첫째, 전통 저널리즘이 선호해온 정보 출처로서 '엘리트'가 이미 사회적 권위를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전 세계의 주류 저널리즘은 엘리트에게 정보를 얻고 그것을 기자(엘리트의 일종)가 가공해 수용자들에게 하향식으로 전해주는 엘리트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엘리트 시스템과 엘리트가 대중의 불신을 받고 흔들리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널리즘이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대의민주주의는 엘리트 시스템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데,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서 볼 수 있듯이 대의민주주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통 저널리즘은 엘리트 시스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고 계속 엘리트 시스템에 안주하려 하고 있다. 이런 엇박자가 저널리즘이 위기에 빠진 첫 번째 이유다.


둘째는 전통 저널리즘이 정보를 획득하고 처리해 온 규범의 엇박자다. 저널리즘은 객관성, 균형성, 중립성, 정확성을 규범으로 신봉하며 일 처리를 해왔지만, 이런 규범은 껍질만 남았고 현장에서 이미 실천의 유의미한 지침으로서 효력을 상실했다고 이들은 말한다. 예를 들어, 기자는 “일을 최우선시”해야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범은 언론노동에 대한 남성주의적 접근법이어서 사회적 지위가 약한 여성의 입을 막고 소외시켰다는 것이다. 또 ‘차별’에 대한 규범은 존재하지만, 여전히 뉴스룸에는 인종주의, 성차별, 여성 혐오, 계급 편견,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 등이 난무하고, 이것이 기사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처럼 현장과 유리된 규범이 오늘날의 언론인들을 '역사책이나 기념 회고록'에나 어울리는 존재로 전락시켰다고 말했다.


마지막은 정보의 최종 도달지로서 수용자가 이미 저널리즘에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전통 저널리즘은 그동안 엘리트로부터 얻은 정보를, 엘리트인 자신들이 선별하여 제시하면, 대중 독자들이 그걸 그대로 수용할 거라고 전제 아래 일을 해왔다. 하지만 그런 전제는 매체가 소수에 의해 과점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등으로 수용자들이 그런 매체를 우회할 통로와 더 흥미로운 즐길 거리를 갖게 되자 그들은 주저 없이 이런 구태의연한 저널리즘을 외면했다.


저자들은 엘리트, 규범, 수용자라는 세 가지 접점을 다시 살피고 재규정해야 저널리즘이 사회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참고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정준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는 이 세 가지 외에 경제적 토대로서 시장과 정보 처리 수단으로서 매체 테크놀로지를 보태 분석했으면 이들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일리 있는 평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소멸하는 저널리즘, 무너진 저널리즘을 되살리려면, 개혁의 길 또는 혁명의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혁의 길은 저널리즘의 제도적 근본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더 선명한 입장을 가지는 것이다. 트럼프처럼 형식적인 민주주의 절차로 선출된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민주주의에 위배된 행동을 한다면 그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행태를 즉각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노선을 따른다면 저널리즘이 우선시할 엘리트는 더 이상 자유주의적 성향의 엘리트, 자신의 이익과 집단만을 대변하는 지식인, 고위직 엘리트가 아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해온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들이 돼야 한다. 이를 통해 뉴스가 전하는 목소리를 확장할 수 있다. 따라서 개혁 노선의 핵심은 ‘사회정의’를 필수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혁명의 길은 저널리즘이 기반했던  자유민주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해방적인 정치 해결책을 다채롭게 모색하는 길이다. 부의 집중, 빈곤 문제, 생태 문제, 소수자 문제 등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이미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안들이 등장하고 있다. 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저널리즘적 상상력을 제한해 저널리즘을 협소한 위치에 머무르게 했다면서, 자유민주주의 그 너머를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엘리트가 전혀 없는 저널리즘, 이상적 규범을 거스르고 현장에서의 쓸모를 최우선으로 하는 저널리즘, 모두를 위한, 하지만 특히 오랫동안 주변부에서 뉴스를 읽고 보고 들어온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저널리즘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저자들이 제시한 두 가지 길은 한국의 저널리즘의 방향 설정에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한국 저널리즘은 저자들이 생각하고 분석하는 전통 저널리즘의 위기보다 훨씬 깊은 중병을 앓고 있기에, 더욱더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한국 저널리즘의 재생을 위해서는 개혁 정도가 아니라 혁명을 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 저널리즘이 처해 있는 위기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고찰해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해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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