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톤, 독재, 윤석열, 민주주의 확산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독재'를 태연하게 벌이던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 살다 보니, 민주주의의 취약성이나 후퇴를 논하는 책에 유독 눈길이 갔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읽은 뒤, 비슷한 책이 있을까 하고 도서관에서 책 목록을 살펴봤더니,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들녘, 조슈아 컬랜칙 지음, 노정태 옮김, 2015년 4월)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한국 번역판 제목만 보면, 두 책 모두 원본이 같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래서 원제를 보니,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원제는 'How Democracies Die'이고,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의 원제는 'Democracy In Retreat'다.
영어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두 책은 다루는 대상과 내용이 많이 다르다. <어떻게…>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강고했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비교 연구해 온 하버드대학의 두 명의 정치학자가 집필했다. 이에 비해, <민주주의 …>는 200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찾아온 제4의 민주화 물결을 경험한 신흥 민주주의 국가들이 왜 실패로 끝났는가를, 미국외교협회의 연구원이 미국의 관점에서 서술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민주주의'를 수출하려는 개발도상국의 민주주의 후퇴 이유와 배경, 그리고 대책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미국에서 개도국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조언하는 미국 중심의 시각(자유주의 패권 전략)이 깔려 있다. 필자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심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는 '미국외교협회' 소속 연구원이라는 점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문명의 충돌>의 저자였던 사뮤엘 헌팅턴은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확산하는 과정에 세 번의 물결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1차 대전까지 서구에서 일어난 것이 제1의 민주화 물결이었다. 제2차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까지 제2의 민주화 물결이 일어났으며, 1990년 초 냉전 종식 뒤 남미와 아시아, 동유럽 등지에서 민주화 운동과 함께 제3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화는 제3의 물결에 들어간다.
이 책은 헌팅턴이 말한 제3의 물결이 끝난 뒤, 2000년대 이후 일어난 민주화 흐름, 즉 제4의 민주화 물결이 일어났던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현상을 다뤘다.
이 책의 매력은, 책상머리에서 가 아니라 저자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도입부는 2010년 태국 방콕에서 일어난 붉은 셔츠단의 폭력 시위부터 시작한다. 비교적 잘 자리 잡았던 태국의 민주주의가 붉은 셔츠 단과 노란 셔츠단의 대결, 그리고 군부의 개입으로 어떻게 후퇴하고 있는가를 그림처럼 보여준다. 이 밖에 말라위, 베네수엘라, 이집트 등의 여라 나라 사례도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가 보는 이들 국가의 민주주의 후퇴 원인은, 책 제목을 훑어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 워싱턴 컨센서스의 실패', '중산층의 반란', '뇌물, 뇌물, 더 많은 뇌물', '중국 모델', '독재자들의 역습', '신흥 강국들의 실패', '서구의 실패'가 주요 제목들이다.
이들 국가들이 민주주의 제도는 도입했지만 경제 성장에 실패했고, 따라서 중산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 민주주의가 단기적으로 오히려 부패를 불러왔으며 선출된 지도자가 배반을 하고 독재로 돌아선 점 등을 이들 국가가 가지고 있는 내부 요인으로 꼽았다. 또 외부 요인으로는 서구 국가들이 경제난에 빠지면서 권위주의 성장 모델인 중국 모델이 이들 국가에서 매력을 얻었고, 서구 국가들이 이들 국가의 민주화를 돕는 데 실패했다는 점, 서구 국가들이 새로 민주화에 성공한 브라질, 남아공 등 신흥 국가들을 끌어들이지 못한 점 등을 지적했다.
저자는 마지막 장(미래를 위한 처방)에서 이들 국가의 민주주의 후퇴의 일차적 책임은 그 나라 지도자와 시민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일곱 가지의 후퇴 방치책을 제시한다.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기대치를 조절하라.
2. 경제성장 멈춤을 방지하라.
3. 중산층과 협력을 유지하라.
4. 선출된 독재자들이 성공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라.
5. 군대로부터 손을 끊어라.
6. 중국 모델의 문제점을 이해하라.
7. 부패와 전쟁을 선포하라.
이어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원조 기관에도 10가지를 당부한다. 아마 이것이 이 책을 쓰고 싶은 진짜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1. 기회가 오면 잡아라.
2.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는 쪽에 지출을 집중하라.
3. 거물 의존에서 벗어나라.
4. 선거의 승자를 존중하라.
5. 선거는 오직 첫 단추임을 깨달아라.
6. 더 나은 판단 방식을 찾으라.
7. 민주화 프로그램은 유연하게 하라.
8. 다국적 민주주의 기구들과 협력하라.
9. 신흥 강국을 끌어들여라.
10. 겸허한 태도를 보여라.
미국 사람이 아닌 처지에서 책을 읽다 보면, 불편한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요즘 미국에서 벌어지고 민주주의 후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자기들 민주주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남의 나라에 무슨 훈수냐는 생각이 불끈 솟아오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빼고 읽으면 배울 만한 것도 꽤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선출된 독재자가 성공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거나 군대로부터 손을 끊어야 한다는 대목은 지금 한국에도 매우 유효한 조언이다. 또 미국의 단체들에 관한 조언 속에서 민주주의 확산을 추구하는 그들의 속내가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다. '삼인행에 필유아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