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 <녹색이념> : 15번 트랙 "암전" (번외)
‘극복과 치유’라는 주제가 결론을 맺었습니다. 극은 끝나고 무대의 불은 꺼집니다. 모두가 퇴장한 무대 위 어둠 속에 배우 홀로 남아 있습니다. 관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죠. 배우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입니다. 그가 앨범에 넣지 않으려 했던 번외의 트랙 ‘암전’이 시작됩니다.
일단 후렴의 가사를 그대로 읽어보죠. 그는 무지하고, 다른 랩퍼들의 성공을 질투하며,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취급 받습니다. 스스로 역사적 흐름에 역행하는 반동세력과 닮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누군가는 이렇게 무시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금 이 문화의 희망으로 볼 수도 있음을 인식합니다. 그러자 이건 어쩌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즉 타협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그의 이념을 음악적으로 계승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살아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는 미묘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가사는 버벌진트의 곡을 오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버벌진트는 정규 2집 [누명]의 수록곡 ‘역사의 간지(奸智)’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유치한 짓들 천지였지 아마도 / 무지와 질투 그리고 시대착오 / 역사적 반동세력들과 닮아있어 / 여기서 질문, 지금 누가 살아남아 있어?” 당연히 여기서 ‘간지’는 ‘간지나다’가 아닙니다. 간사한 지혜라는 뜻이죠. 종종 가사에 철학적 개념을 등장시킨 바(‘사자에서 어린아이로’, ‘여여(如如)’ 등) 헤겔의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을 따온 것이 크게 신기하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도 헤겔은 잘 모릅니다만 대강 ‘역사의 배후에는 절대적인 이성이 있어서 역사를 전진시키고, 그 과정은 필연적이다’라는 컨셉 정도로만 알고 있어도 좋을 것 같군요. 어쨌든 버벌진트는 자신이 몰고 온 혁명은 역사적 필연성 위에 올라타 있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반발은 전부 무지와 질투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이라고, 너희들은 결국 역사의 흐름 속에 씻겨 사라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묻죠. 지금 누가 살아남아 있냐고. 결국 내가 옳았음을 생존한 자기 자신을 통해 증명하는 곡이죠.
김태균은 이 문제를 오히려 거꾸로 뒤집습니다. 자신이 그 패배한 역사적 반동세력들과 닮아있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라면 타협하고 살아남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더 큰 뜻을 이룹니다. 이 상황에서 가치는 생존에 부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존은 최고의 치욕이고, 죽음은 최고의 저항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수많은 순교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초기교회의 신앙인들이 탄압을 이겨냈던 하나의 원동력 중 하나로서 하나하나의 죽음을 패배가 아니라고 인식했던 것을 언급할 수 있겠죠. 그들의 죽음은 더 큰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더 큰 저항의 밑거름으로서 승화되었습니다.
김태균은 과거 부모님에 의해 ‘책상’ 앞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자유’, ‘진실’, ‘정의’를 외치며 음악이라는 해방구를 열어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고 그들을 따라 음악을 한 끝에 같은 자리에 서게 된 지금, 그들은 더 이상 그런 거대한 단어를 위해 음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단어들은 전부 신기루였을 뿐이라고 비웃습니다. 김태균은 여전히 ‘더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고 그것을 ‘내가 가진 가치’로 삼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런 발상은 이제 그저 ‘역사의 간지’를 거스르며 뒤쳐지는 이들의 ‘무지’이고, ‘질투’이고, ‘시대착오’일 뿐입니다. ‘그가 가진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김태균은 그들의 비아냥거림을 받아넘기며 여전히 그들을 향해 같은 구절을 반복합니다. “무지와 질투 그리고 시대착오 / 역사적 반동세력들과 난 닮아있어” 과거로부터 빌려온 그 가사 위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광주 민주화 운동가, 광화문 시위대의 이름을 하나씩 쌓아올립니다. 누구보다도 역사의 흐름을 바꿔온 이들은, 돈, 여자, 가족 같은 현실의 이유로 자유, 진실, 정의라는 가치에 변질되거나, 변절하지 않는 이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 생존은 최고의 치욕이고, 죽음은 최고의 저항입니다. 왜냐하면 자유, 진실, 정의에 부합하지 못한 인간은 역사 앞에 떳떳하게 눈감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되려 그렇지 못한 이들이 역사의 이름을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Sell-out’하면서 까지 살아남은 랩퍼들에게 일갈합니다. “여기서 질문, 지금 누가 살아남아있어.”
하지만 김태균 역시 역사 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의 단어들 역시 다른 이들처럼 현실에 굴복하고, 침묵하고, 타협을 일삼아 그가 욕하던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아졌기 때문이죠. 더 이상 그들과의 차이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애석하게도 그에게도 이제 역시 순수를 외칠 자격은 없습니다. “아직 변하기 전 타협하기 전 / 당신의 음악의 영향이 나에게 남아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동시에 일어난 교통사고에 의해 이념적인 그는 사망합니다. 마지막 마디가 끝나고 교통사고로 충돌한 이후 오른쪽 방향으로 미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다. 아마 경찰차 혹은 구급차의 것으로 삽입된 듯 합니다.
이제 암전에 숨겨진 장치 얘기를 마지막으로 기나긴 [녹색이념] 리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앞서 얘기했듯 그는 ‘암전’에서 마지막 라인을 끝으로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다소 의외의 방향처럼 들릴 수 있는 쪽으로 풀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질문. 음악가가 죽은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걸까요? 에픽하이는 4집 수록곡 ‘Public Execution’에서 총 맞아 죽으며 음악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반면 김태균이 죽은 자리에는 ‘이념적 김태균’의 시체가 남았습니다. 사실 ‘이념적 김태균’은 이미 [녹색이념] 내내 죽음에 가까워졌습니다. 단지 ‘암전’에서 확인사살 했을 뿐이죠. ‘세상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이제 ‘내 자신에게 화가 난’ 결과 ‘극복과 치유’를 꿈꾸게 된 그가 단순히 버벌진트가 실망스럽고, 나는 억울하고, 그래서 비난하기 위해서만 이 트랙을 썼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