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그 찬란한 순간들
알록달록 가을 산에 홀려 홍천시골집에 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집은 일주일에 한번정도 동생과 내가 찾아가 번갈아 관리를 하고 있다. 낮 동안, 돌보지 못했던 집구석구석을 살피고, 치우고, 바꾸었다. 아직도 현직에 있는 나로서는 가끔 이 집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을 지금까지도 놓지 못하고 있다. 십 여 년이 그렇게 흘렀다. 요즘에는 바쁘게 살던 삶도 한가해지고 동생 둘도 작년 말에 정년을 맞았기 때문에 우리형제는 그 전보다 자주 만나 시골 살이를 하고 있다.
계속 말썽을 부리던 시골집 부엌 수전이 결국 수명을 다했다. 돌보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들도 있지만 세월이 흘러 삭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한번 고쳐보겠다고 두 남자가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의기양양 수리를 시작한 두 사람은 일을 더 크게 벌여 놓았다. 전문가가 아니니 충분히 그럴 만 하다. 하는 수 없이 이 참에 부엌 모두를 바꾸기로 했다. 살지도 않는 집에 돈을 쓰려니 씁쓸하긴 하지만 결국 무엇이던 해야 하는 시기는 오게 마련이다. 진통이 시작되면 아기를 낳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부엌 리모델링하는 날엔 내가 다시 들어오기로 했다.
부엌 사건과는 별개로 동생 부부와 내일 단풍구경을 가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김밥도 싸고 반찬과 맨밥도 가져가서 길거리 표 라면에 말아먹기로 했다. 길에서 끓여먹는 라면의 맛이란 안먹어본 사람을 절대로 알수 없다.
소풍계획은 새벽 다섯 시에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한 산모의 소식으로 찬물이 끼얹어졌다. 준비했던 길거리 표 음식 재료들은 모두 올케 몫이 되었다. 샘이 나게도 단풍을 보러 가는 강원도 방향 도로는 이른 새벽부터 주차장이다. 그들과 반대편 길 위에 내가 있을 것이다. 홍천의 아침온도는 영하 3°C, 차 앞 유리창엔 성애가 빼곡하다. 세수는 집에 가서 하기로 하고 우선 시동을 걸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부재중 전화, 여섯 시 17분 부재중 전화. 나와 통화가 안 되어 불안해진 그들은 비상전화로 전화를 했다. 3'30"간격의 진통이 온다고 상황을 알려왔다. 진통이 시작한지 채 다섯 시간도 지나지 않아 3~4분 간격으로 좁아진 진통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 일 수도 있다. “*초산이잖아요. 한 시간만 더 기다려 볼까요?” 나도 느긋이 시간을 벌어놓았다.
아무리 오래 조산사로 일을 했더라도 지극히 개별적인 출산의 과정에 확언을 하기 어렵다. 예상과 빗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제 막 진통이 시작된 산모의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직 멀었다는 끔찍할 것 같은 이야기기보다 긍정의 단어를 선택하는 것도 나름 중요하다. 하지만 진심으로 아직 갈 길이 멀다. 초산 출산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15시간! 처음 예닐곱 시간은 충분히 진통을 즐겨도 된다. 남편과 공원을 산책한다던지 그동안 체중관리로 실컷 먹지 못했던 음식들을 먹는다. 오늘, 밤샘을 할 남편에게 낮잠선물을 해도 좋고 원하면 언제든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해도 된다. 따듯한 물은 진통하는 산모에게 신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세상에 태어나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모두 해도 된다.
대부분의 초산 산모들은 진통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동안 출산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잊곤 한다. 일일이 다시 알려주고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번 역시도 여느 초산 산모와 다를 바 없다. 패드나 옷에 묻은 피 섞인 이슬 사진도 꼼꼼히 보내오고 진통 간격 잰 결과도 엄청 많이 전송되고 있다. 느긋함 보다 초조함이 보인다.
정말 오늘 이 산모의 출산 진행은 다른 초산모보다 빠른 걸까?
초산이건 경산이건 내게는 출산이 모든일의 우선이다. 아기 받는 일을 접기 전까지 그럴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것이 일 순위다. 누누이 초산 산모들에게 '진통 시작'에 혼비백산 하지 말라고 해 놓고선 정작 나 자신은 혼비백산이다.
출산의 장소까지 가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 등등은 산모가 도착하는 시간과 적절히 맞아야 한다. 산모에게 준비되지 않아 허둥대는 모습은 보이기 싫다. 날이 추워졌으니 빨리 도착해서 출산 방을 따듯이 해놓는 일도 더해져야 한다. 작은 규모의 조산원은 위 아래 일이 없다. 난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만능 맥가이버여야 한다.
새벽같이 달려 출산센터에 도착했건만 아침 열 시 반이 되도록 아직 그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서둘러, 마음 졸이며 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천천히 샤워도 하고 예쁘게 화장을 해도 되었을 것을! 왜 나는 지금껏 "진통시작"에 끌려 다니고 있을까? 왜 진통시작 소식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지, 평생 아기를 받고 단련이 될 만도 한데 여전히 처음과 같다.
내가 아는 어느 조산사는 그렇게 느긋할 수가 없다. 정말 급하게 되는 진행 앞에서도 지극히 초연하다. 설사 도착하기 전 아기가 태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상황을 받아들인다. 강심장을 갖고 있는 건지 무서운 일을 겪어보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난 죽어도 못 그런다.
오전 열 시 사십 분, 그들이 도착했다. 문을 열며 "까꿍?" 나의 재롱에 웃지를 않는다. 제대로 진통 오는 것 맞다. 진찰을 해 보니 50% 진행되었다. 야호!
처음으로 아기를 낳는 산모가 진통시작 5시간 만에 50%가 진행된 것은 대단히 희망적인 것이다. 순산을 예감한다. 산모 옆에서 진통의 간격과 강도를 재보니 정말로 2.3.4분 간격으로 강하게 진통이 온다.
산모 곁의 인간 진통제, 둘라들을 불렀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산모의 곁을 지키며 지지해주고 쓰다듬으며 아픈 곳곳을 정확이 짚어내어 풀어주는 그들, 둘라! 세상에 사는 여자들이 아기 낳을 때 보살핌을 주었던 또 다른 여자들. 과거의 그들은 지금 둘라라는 이름의 전문직업인이 되었다.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출산이 시작되면 뛰어와야 하는 사람들이다.
진통이 오는 산모 소식에 그들은 꽉 찬 오늘의 스케줄 조정하느라 난리가 났다. 잠시 후 도착한 그들은 산모의 골반 곳곳을 쓰다듬고 눌러주고 출산에 이로운 자세를 취하게 했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 출산이 극에 달할 시간이 될 때까지 잠시 휴식을 취했다.
11시, 이십대의 젊은 산모는 진통을 잘 견디고 있지만 간간히 쉬는 시간엔 진통으로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위로와 칭찬이 수없이 더해졌다. 진통이 강하고 자주 오니 그런 말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잘 견디는 젊은 그녀가 자랑스럽다.
70퍼센트의 진행이 되자 진통을 줄이기 위해 수중출산 풀에 들어갔다. 따듯한 물은 진통을 줄여주며 이완을 도와 자궁 문을 쉽게 열리게 한다. 그 말이 맞았다. 따듯한 물 덕택에 자궁 문은 더욱 후루룩 풀려버렸다., 그 길 따라 쑥쑥 잘도 내려오는 아기.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자궁 문이 다 열렸다. 삼 십분 정도가 지나자 힘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들여다보니 양막이 바깥으로 풍선처럼 나와 있다. 그 안으로 뽀얀 양수가 보인다. 예상 데로 역시 깔끔하다.
진통이 사라진 후 아기의 머리를 만져 보았는데 다른 여느 아기들보다 단단하다. 아기의 머리가 단단한 것은 출산 예정일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 산모는 예정일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
교과서에 적힌 데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아기가 증명하고 있다. 그곳의 모두는 아기의 단단한 머리 때문에 좀 더 애를 써야 했다. 산모와 둘라들, 그리고 나, 네 여자는 산모의 힘주기를 도왔다. 산모가 맘 편하게 힘을 줄 수 있도록 남편은 거실에서 대기하시라고 했다. 양 다리를 잡고 아기가 나오는 곳을 쳐다봐야 하는 출산 막바지, 가끔 조산사는 산모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기지가 필요하기도 하다. 애쓰는 산모에게 일일이 묻지 않아도 그 안의 공기로 충분이 가늠할 수 있다. 다섯 걸음 밖에 앉아 있는 그는 아내의 애쓰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후 2시 45분, 조산원에 도착한 지 네 시간 만에 젊은 산모는 아기를 가슴에 안았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뛰어 들어 온 남편은 아기를 보고 한참을 훌쩍였다. "우는 거야? 왜 울어? 진짜 울어?" 지칠 만도 했지만 오히려 산모는 씩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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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의 초산, 3.1킬로의 적당히 자란 아기, 비좁지 않은 골반, 남편의 외조, 자연출산에 대한 의지 등이 아기를 만나는 시간을 앞당겼으리라.
진통 시작 열 시간 만에, 일반보다 다섯 시간을 앞당겨 그녀는 건강한 아들을 수중출산으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