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 재배하는 청년 농부 강상우
3년 전에 상우씨는 콩밭에서 울었다. 9년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까지 있는 서른 살 가장은 주저앉아 울었다. 폐염전을 개간한 군산 하제 땅 1만 평, 임대해서 콩을 심었다. 콩이 자라는 모습은 대견했다. 수확을 한 달 앞두고서 지독한 가뭄을 만났다. 하루에 40만 원씩 주고 살수차를 빌려서 밭에 물을 퍼부었다. 콩은 다 타들어갔다. 불가항력이었다.
다음 해 여름에는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한꺼번에 파랗게 돋아나서 자라던 콩은 폭삭 주저앉았다. 그래도 상우씨는 콩 농사를 팽개치지 않았다. 지인에게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소개 받았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땅 1만 5천 평, 임대료는 없었다. 군산에서 전용도로를 타고 쉬지 않고 오가면 왕복 4시간, 상우씨에게는 아득한 거리가 아니었다.
“승합차에 같이 일할 동네 할머니들 여덟 명을 모시고 갔어요. 1톤 트럭에는 기계를 싣고요. 그렇게 차 두 대 움직이면 경비만 25만 원 들죠. 근데 콩 농사는 손이 많이 안 가요. 한 해 동안 용인에 많이 가야 10번, 250만 원 들어요. 군산에서는 더 작은 면적을 빌리는데 임대료가 천만 원 넘었거든요. 용인은 농사도 잘 됐어요. 몇 천만 원의 수익을 냈어요.”
상우씨는 태어나보니 ‘회현 떡집’의 손자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해야 하는 떡집의 고된 일, 할머니와 어머니가 맡아서 했다. 어린 상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할머니 곁에서 일을 돕다가 학교에 갔다. 성인이 된 상우씨는 제대하고 호원대학교 전기학과에 복학하면서부터 농사를 직업으로 삼았다. 그 때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힘들게 몸 쓰면서 일해도 불확실성이 큰 게 시골 일이니까. 상우씨는 “떡집 일이 없을 때는 콩 농사를 하면 돼요” 고집을 부렸다. 한 분야의 명인까지 되고 싶은 상우씨는 할머니한테 메주 쑤어서 된장 담그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콩 농사를 포기 안 했다. 씨 뿌리고 수확까지 5-6개월, 열흘 정도만 바짝 일하는 것도 콩 농사의 매력이었다.
스물일곱 살 상우씨, 순창에서 열린 농축산식품부의 장류 교육을 6개월간 받았다. 일본에 가서 쯔게모노(장아찌)와 미소된장을 만드는 현장도 보았다. 그는 차츰 발효식품과 발효효소에 눈을 떠갔다. 농업기술원, 평생교육원, 임업진흥원에서 열리는 교육마다 찾아다녔다. 그의 동료는 50대나 60대, 그 속에서 상우씨는 각종 약초와 식품관련자격증 8개를 땄다.
상우씨가 농사지은 지도 5년째, 자기 소유의 땅은 없었다. 집 옆에 딸린 텃밭이 전부였다. 동네 사람들은 떡집 손주가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여기 농사지을래?” 하면서 땅을 맡겨왔다. 상우씨는 군산시 회현면 일대 20여 군데의 땅에 농사짓게 됐다. 그는 씨가 발아해서 싹이 나고, 대공이 올라오고, 알이 맺히는 모습에 매료됐다. 보기만 해도 좋았다.
“상우야, 이거 한번 해 보자!”
어느 날, 충남 공주에서 와송을 보고 온 아버지가 말했다. 마침맞게 약용식물에 관심을 쏟고 있던 상우씨는 흔쾌하게 따랐다. 처음에는 땅 1백 평에 와송을 심기로 했다. 친척한테서 6백만 원을 빌려서 종자 만 개를 사왔다. 첫해 농사에서는 심은 와송 중 50%만 살려도 성공이라고 본단다. 상우씨는 그 중 90%를 살려서 2천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완전 대성공이었죠. 콩 농사를 몇 만 평 하는 것보다 와송이 훨씬 낫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도 고민이 따라왔어요. 저도 그렇고, 대다수의 농민들도 빚을 안고서 일을 하고 있어요. 근데 빚지고 농사를 짓다가는 정말 힘든 상황을 만나게 돼요. ‘이건 전망이 좋아’ 하면서 무리를 하면, 농사는 순식간에 주저앉을 수가 있거든요. 태풍이나 가뭄 닥친 것처럼요.”
상우씨는 콩 농사 전에 고추농사를 지었다. 수확의 기쁨이 커서 땡볕에서 고추 따는 일은 안 힘들었다. 그러나 고추는 일일이 사람 손이 닿아야 했다. 가격변동은 예측조차 안 됐다. 그는 6년간 농사지으며 성공과 실패 속에서 알았다. 식량자원과 약용식물, 단기소득작물(콩, 와송, 어성초)과 중장기소득작물(매실, 감, 구찌뽕, 산양삼)을 같이 해야 좋다는 것을.
자칭 '게으른 농부‘인 상우씨는 콩처럼 손이 많이 안 가는 약초를 선호했다. 피를 맑게 해 주는 어성초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자소엽은 상우씨에게 딱 맞았다. 작물을 심어놓고 풀 관리만 두세 번 해 주면 수확 철이 왔다. 더구나 깻잎처럼 생긴 자소엽은 새순을 끊어서 거두고 뒤돌아서면, 또 새순이 올라왔다. 1년에 네다섯 번까지 수확할 수 있었다.
작물 중에서 상우씨가 가장 힘을 쏟는 건 와송이다. 첫해는 1백 평, 작년에는 2천 평에 와송을 심었다. 올해는 1만5천 평에 70만 개의 와송을 심는다. 와송은 30-40cm까지 자라는 약용식물이다. 항암효과가 있다. 해열, 지열, 간염, 아토피, 위와 장에 특효가 있다. 기와 위나 바위틈, 산과 밭에서 자란다. 1년 전부터 한약재뿐 아니라 식품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약초 생산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판매가 힘들죠. 사람들한테 이게 어디에 좋은지를 납득시키기가 어렵죠. 그래서 한국바위솔(와송)협동조합에 가입했어요. 거기로 와송을 출하해요. 협동조합은 노지에서 재배한 와송만 받아줘요. 와송은 비를 많이 맞으면 주저앉아요. 근데 비밀하우스 거는 햇볕을 못 봐서 ‘제7의 영양소’라는 파이토케미칼 성분이 별로 없어요.”
한편, 상우씨는 시험재배를 해 봤다. 전북 임실의 작은 땅에서 세 사람이 콩 농사를 짓고는 똑같이 수익을 나눴다. 작년부터는 본격적인 ‘공동농장’을 꾸렸다. 약용식물을 공부하는 동료 일곱 명과 함께. 공동농장의 장점은 비용 부담을 던다는 것과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지인 판매가 쉽다는 것. 사는 지역이 제각각이라서 한두 명만 농사를 짓는 게 단점이었다.
올해도 상우씨는 공동농장을 계속한다. 와송 1주당 500원, 2만 주를 1천만 원에 분양했다. 투자자 일곱 명을 모아서 농사지을 땅을 임대했다. 밭을 뒤집고, 로타리를 치고, 퇴비를 갖다 넣고, 줄을 맞춰서 관리기로 고랑을 파고, 쇠스랑으로 북을 주는 일은 상우씨가 맡아서 한다. 그는 공동농장 ‘밴드’에 날마다 작업 내용과 작물의 성장 모습을 올린다.
“농사는 ‘3년에 한 번만 풍년이 들어도 돈 번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를 할 수 있는 게 농사예요. 제가 투자자를 모아서 하는 공동농장도 망할 수가 있어요. 자연재해가 오면요. 작년에 밭 상황을 공동농장 하는 분들한테 날마다 알려줬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니까 충분히 이해해 주더라고요. 모든 투자는 손실을 볼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 상우씨는 농부가 밭에서 일하며 콩이나 고추한테 말 건다는 의미를 몰랐다. 요새는 안다. 밭에 가면, “약성 좋게 잘 자라서 여러 사람한테 도움 되어라”고 말한다. 옛날 사람들이 장 담그는 날짜를 받고, 목욕 재계를 하고, 장항아리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했던 마음을 헤아린다. 그는 부정 탈까 봐 욕심을 품지 않는다. 잡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부터 ‘회현 떡집’에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상우씨 부부와 아기까지 4대가 함께 산다. 상우씨는 군산 미룡동의 한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는 농부였다. 농사 규모가 커지자 그의 아내는 “시댁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상우씨는 부담을 느꼈다. 그는 젊다. “일찍 들어와라” “일찍 일어나라” 같은 잔소리 듣는 게 싫었다. 도심에서 살고 싶었다.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부모님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으시는 거예요. 저희 애기를 계속 쳐다보고 계시려고요. 그 눈빛이 너무 맘에 걸렸어요. 제가 장손으로 자라서인지 늘 마음속에 책임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파트 팔고 들어왔어요. 와송 농사도 만 평 이상 지어서 출퇴근 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고요.”
작년에 상우씨는 협동조합에 11톤 트럭 두 대분의 와송을 납품했다. 올해는 약 50만 개를 조합에 보낼 예정,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나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와송을 사가는 큰 회사들은 순식간에 마음을 바꿀 수가 있다. 이윤을 따라가는 곳이니까. 상우씨는 고민했다. 당장 올해 농사지어서 생기는 잉여 와송 20만 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우씨는 동갑내기 아내 박은하씨와 오랫동안 의논했다. 그는 공동농장을 만들 때처럼, 와송과 어성초, 자소엽으로 뭐라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잉여 약초로 비누, 화장품, 모발 스프레이, 먹는 환과 가루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한테 “관절염에 좋아요. 탈모에도 좋고요.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도요”하면서 줬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해를 못했다.
“상우야. 힘들게 농사지어서 그렇게 다 퍼주면, 너 거지 되겠다. 응?”
“걱정 마세요. 모르는 걸 어떻게 돈 주고 사요? 저부터도 안 사는데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한테 와송이랑 약초가 몸에 좋다는 걸 알려 줘야죠.”
상우씨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더딘 길을 택한 셈이었다. 그가 만든 약초 제품들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루 평균 50-70만원씩 주문 전화가 온다. 농사지은 지 7년째, 땅 임대하고 작물 사면서 진 2억 원의 빚도 줄고 있다. 올해는 와송으로 3억 원. 떡집과 약초가공으로 1억 원의 수익을 예상한다. 그러나 태풍이나 가뭄을 만나면, 별 수 없다는 그가 말했다.
“농부는 1년 내내 일하지 않아요. 저 같이 게으른 농부도 콩 농사지어서 논 1,600평을 샀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평생소원이 논을 갖는 거였거든요. 농사는 어떤 직업보다도 메리트가 있어요. 체계적으로 하면요. 저는 사람들한테 약초나 발효식품을 알리고 싶어요. 몸이 아프면, 사람들은 산으로 가잖아요. 그 분들이 산책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요. 약초를 가공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요. 진정한 의미의 6차 산업, 그게 제 꿈이에요.”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