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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헤이 Mar 23. 2024

베이글

모든 무기력함과 허무함과 나쁜 기억을 베이글의 블랙홀 속으로.

포카치아, 치아바타로 빵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이후로 줄곧 베이글에 도전했다. 사실 가장 만들고 싶은 건(내가 주로 많이 먹는 빵) 식빵과 사워도우지만 특별히 구비해야 할 재료나 도구 없이, 비루한 나의 오븐으로 제약 없이 만들 수 있는 베이글이 식사빵으로는 제일 만만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베이글은 담는 재료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베리에이션 할 수 있는 빵이라는 것을 만들어보면서 알게 되었다. 또한 그 활용도도 어마어마하다. 덕분에 요즘 나의 냉동고 속에는 홈메이드 베이글이 종류별로 가득 차 있다. 요즘 힙하다는 베이글 집들의 베이글을 모두 다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척 보기만 해도 그네들의 베이글에 비해서 당연히 내가 만든 베이글은 한 없이 초라하다. 어찌나 화려하고 맛있고 멋진 베이글이 조그마한 이 나라에 이리도 많은겁니까? 나 역시 하나하나 찾아가서 사 먹어보고 싶지만 머나먼 곳까지 발품을 팔고 줄을 서지도 않고 몇 만 원을 긁지 않아도 만들자마자 먹을 수 있는 가성비 넘치는 홈메이드 베이글의 매력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가게를 찾아갈 강력한 욕구가 샘솟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든 베이글, 나름 맛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구. 훗.




그러나 조금 나아지는가 싶던 나의 무기력함의 상태가 최근 말끔하지 못했던 전 회사와의 마찰 그리고 마음이 끌렸던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 미끄러지는 경험을 한 후,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지원할 때는 그 회사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이후의 커리어적인 방향성을 못 잡다 보니 단순히 흥미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그 회사에 마음을 쉽게 줘버렸다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자리에 적임자라 확신하던 실무자에 말 한마디를 내가 너무 순진하게 믿어버렸던 것 같다. 다행히 2차 면접 때 만난 대표와 임원진의 태도가 이상하게 쎄-했으므로 더 이상 사람으로 고통받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시려 그 회사를 피하게 해 주셨다는 자기 위로를 하며 쓰라린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기대할 다음이 또 없어졌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끝도 없는 블랙홀 속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나마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던 일도, 카페에 가서 영어 공부를 하던 일도, 의욕적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던 일도 한 번에 모두 놓아버렸다. 이건 단지 마음의 무력함이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는 걸 알고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내 몸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집은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고 밥 먹는 게 귀찮고 입맛도 없어 해외여행 때나 사본 라면을 사 보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역시도 한 봉지 이상 먹지 못했지만. 라면을 끓이는 것조차 싫어 과자와 빵으로 대충 때우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요리가 힐링이고 명상이라고 외쳤던 나는 안타깝게도 요리의 의지조차 꺼낼 수 없었다. 매일을 침대와 소파 위에서 보냈다. 조금의 진지한 생각도 피하고 싶어 의미 없고 시시한 콘텐츠 따위에 눈을 두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왜지?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같은 생각들을 하며 쓸데없는 과거의 생각들을 끊임없이 돌려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이렇게 나태하게 하루를 날린 나에 대한 죄책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내일은 결코 이렇게 보내지 않으리라, 뭐라도 하리라라고 다짐하며 잠에 들지만 다음 날이 되면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소파 위에 박제된 듯 앉아 하루를 날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도저히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던 나였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속 우울감은 어떤 병보다 신체적인 무력함을 강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다 어떻게 몸을 일으켰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아빠와 동생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던 날, 나 스스로에게 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정신 차리라고 뒤통수를 내리쳤던 덕분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최근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신 할머니를 보고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정신 차리라고 다시 한번 뒤통수를 내리쳤던 덕분인지 모르겠다. 정신적인 충격 요법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의 치료 요법도 병행했다. 매일 나에게 하나의 미션을 주고 그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으로 차근차근 몸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매일 2개 이상의 행동 목표를 세워놓고 그걸 못 지켜서 죄책감을 갖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미션은 화장실 청소, 오늘의 미션은 일주일치 빵 만들기, 오늘의 미션은 면접 보기, 오늘의 미션은 누구든 만나보기... 이렇게 하루하루의 미션들을 클리어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움직이기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급격히 마음과 몸의 회복이 이루어진 건 오랜만에 묵은 청소를 했던 날이었던 것 같다. 묵혀왔던 화장품들을 버리고 쓰지도 않고 쌓여있던 욕실 용품도 싹 정리했다. 냉장고에 먹지도 않고 묵혀있던 것들도 하나씩 정리를 시작했다. 막상 정리를 할 때는 별생각 없이 정리를 했지만 틈틈이 집안 곳곳에 쌓여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과연 필요할까를 고민하고 간직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분류하는 이 행위 자체가 정신적으로도 어떤 치료의 작용을 하지 않았나 싶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생각, 미련, 습관, 애정 따위를 버릴 수 있다는 다짐이 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주 단순하게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의 집을 보고 나니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이름 모를 동기가 샘솟았을 수도 있다. 아무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나가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졌다.




묵은 청소를 끝냈던 날, 하루의 미션을 마치고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티비를 켰다. 영화 리뷰 프로그램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리뷰를 해주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았던 건 22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육아에 찌들어있는 아는 동생에게 하루의 휴가가 생겼고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를 그녀의 집으로 초대해 1박을 권유했다. 야심한 밤, 우리는 무얼 할까 고민하다 그녀의 집 근처에서 심야영화를 보기로 했다. 나 역시 한동안은 꾸준히 금요일 밤마다 홀로 심야영화를 보러 다녔었다. 샤워를 하고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맥주 한 캔을 사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집 앞 극장에서 꾸준히 심야영화를 보았다. 머리를 말리며 2~3명 남짓한 사람들과 함께 드넓은 극장에서 맥주를 들이켜는 금요일 밤의 루틴에 한동안 중독되었달까? 아쉽게도 극장과의 거리가 멀어진 현재의 집으로 이사와서는 이 좋았던 루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보게 된 그날의 심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22년에 내가 보았던 콘텐츠 중 최고였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꼭 보기를 추천하고 다녔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영화 리뷰 프로그램으로 마주한 줄거리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의 무기력한 내가 보였다. 돌이 되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바라보는 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마냥, 베이글 블랙홀 안에 처박아 버리고 나 자신도 그 안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허무함. 그때는 백 프로 공감할 수 없던 조이의 상태가 이제는 공감을 넘어 내 얘기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22년의 나는 흥미롭고 즐겁게만 보았던 이 영화를 24년의 나는 아프게 마주했다. 웃긴데 웃을 수 없는 아이러니. 프로그램이 끝나고 난 후, 무슨 생각이 스쳤던 것일까? 베이글을 만들겠다라며 냉장고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맛있어 보이는 베이글 따위가 나온 것도 아닌데 아마도 그냥 단순히 베이글이 먹고 싶었을 수도?




그동안 야금야금 다양한 베이글을 만들었지만 가장 많이 만들게 되는 베이글은 어니언 베이글이다. 밋밋하지 않고 토핑 중 가장 무난한 맛으로 먹을 수 있는 베이글이기도 하며 양파가 주는 약간의 단맛이 밀가루의 단맛을 조금씩 끌어올려주는 느낌도 든다.(아! 이건 반죽을 삶을 때 넣어주는 꿀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먼저 반죽에 함께 넣어줄 '폴리쉬'를 만들어준다. 폴리쉬는 사전에 먼저 발효시키는 반죽으로 나중에 본 반죽이랑 섞는데 폴리쉬로 만드는 빵들은 기공이 뻥뻥 뚫린 쫄깃한 발효빵의 매력을 살려주는 것 같다. 사실 완전한 발효 베이글을 만들고 싶어 르방을 만드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해보았으나 매번 실패해 다신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는데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이렇게 집에 붙어 있을 때 한번 시도해 볼까?라는 마음이 불현듯 스친다. (그래, 하루에 하나씩!) 폴리쉬는 소량의 강력분에 이스트와 따뜻한 물을 섞어 만든다. 밀가루와 물은 거의 동량으로 일반 반죽보다 약간은 묽은 형태다. 보통은 2시간 정도 발효시켜 주고 사용해도 되는데 나 같은 경우는 매번 폴리쉬는 전날 만들어 실온 발효시켜 주다 냉장고에서 하루 정도 보관해 다음 날 사용하곤 한다. 발효가 잘 되어 액체와 고체의 중간 상태로 주욱 늘어지는 폴리쉬를 반죽에 넣을 때면 마치 MSG를 넣는 기분이다. 이 폴리쉬가 마법처럼 빵맛을 극상으로 끌어올려줄 것만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기능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쥬르륵 흐르는 폴리쉬. 적당히 발효된 폴리쉬 한 스푼은 마법처럼 발효빵을 완성시켜줄 것만 같다.


본격적인 본 반죽은 강력분에 설탕과 소금, 물을 넣고 전날 만들어둔 폴리쉬를 넣어 반죽한다. 본 반죽의 밀가루와 물의 비율은 2:1 정도이며 설탕과 소금은 작은 1스푼 정도이다. 나도 처음에는 여러 개의 유튜브나 블로그를 보면서 양을 계량하곤 했지만 아시다시피 극단적인 휘뚜루마뚜루 요리사이므로 요즘은 대략 반죽의 상태를 보며 물의 양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휘뚜루마뚜루가 되려면 최소한 3번 정도는 정확한 계량으로 반죽의 상태값을 손에 저장해 두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뭐 실패해도 내가 먹는 거니까. 하나로 반죽이 뭉쳐지면 버터를 첨가한다. 나는 주로 발효 무염버터를 사용하는데 특별히 다른 맛을 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발효빵을 만드는 것이니만큼 왠지 발효버터를 사용해야 하는 것 같다는^^;; 가끔 버터를 녹이기 싫을 땐 기버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정말 이 버터 하나로 달라지는 특별한 차이점은 못 느끼는 것 같다. 예민한 감각이란 것이 없어서 그럴 수도. 맛있으면 됐지. 버터를 넣어 반죽을 하는 일은 꽤 힘이 드는 일이다. 처음에는 하나로 섞이지 못하는 버터들이 이리저리 손에 묻고 난리도 아니다. 반죽 기계가 있으면 좋겠지만 나처럼 모든 걸 도구 없이 손으로 해내는 방구석 베이커들에게는 부지런히 손반죽을 해주지 않으면 버터와 반죽을 완전한 하나로 잘 섞어내는 건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여러 번의 치댐으로 반들하게 변해가는 반죽의 상태를 보면 온몸의 힘을 실어 열심히 반죽을 만들어낸 나의 보람이 느껴지곤 해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뿌듯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매끈해진 베이글 반죽. 버터를 넣으면 하얗기만 했던 반죽이 노~란색으로 변한다.


이 뿌듯함을 느낄 새도 잠시, 양파를 넣어 섞어주다 보면 더 큰 카오스를 느끼게 된다. 양파는 잘게 잘라 카라멜라이징 상태로 볶아 식혀서 준비하는데 버터를 섞을 때와는 달리 잘게 잘라진 양파는 사방팔방 날아다닐뿐더러 잘 섞이지도 않는다. 이리저리 반죽에서 이탈되는 아이들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어차피 베이글을 성형한 후 한번 삶아낼 때 다시 한번 이탈되는 양파 조각들이 생긴다. '어떻게 그 지겨운 볶는 단계를 겪어냈는데 이 한 조각을 그냥 버릴 수가 있어!' 싶을 정도지만 이내 집착하지 말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목표는 맛있는 베이글을 만드는 일일뿐. 사소한 단계에 매번 집착하는 나는 정말 큰 사람은 못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건 성격일까? 스스로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연습을 하지 않는 이상 이 바보 같은 짓은 평생 계속될 것 같은, 아니 점점 심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후천적으로 가능해질지 모르지만 연습하자. 내려놓자. 그렇게 간신히 버터와 양파를 하나로 합해 매끈하게 만들어준 반죽이 부풀 때까지 1시간 정도 쉬게 해 준다. 고생했으니 너도 좀 쉬렴.

다음은 g수에 맞춰 5~6개 정도의 반죽으로 분할해 주고 동글리기를 해준 후 다시 한번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다. 베이글을 크게 만들고 싶을 때는 110g 정도로 분할해 주지만 꾸준히 소식을 실천해야 하는 나는 75~80g 정도로 분할해 미니 베이글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미니 베이글은 동그랗게 구멍이 난 예쁜 베이글의 모양을 만들어내긴 어려운 것 같다. 예쁘게 만들고 싶다면 크게 크게.


이렇게 쉬는 시간을 가지면 이후 베이글 모양의 성형이 조금 더 쉽다. 해놓고 보니 참 뿌듯한 양파 섞기.


다음 과정은 본격적인 베이글 모양의 성형 단계다. 여러 가지 성형 방법이 있는데 나는 동그란 반죽을 타원형으로 길게 늘여 펴준 후 긴 방향으로 반죽을 조금씩 접어주며 방망이 모양을 만든다. 반죽이 접히는 부분은 꼼꼼히 꼬집어 주면서. 그렇게 방망이 모양을 만들어 양끝을 잡아 바닥에 살살 쳐주면 반죽이 길게 늘여진다. 이때 반죽의 양 끝을 돌려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준다. 반죽의 한쪽 끝을 눌러 펴주고 다른 한쪽의 끝을 올린 후 늘린 반죽으로 동그란 반죽 끝을 감싸듯 포개어주고 역시 야무지게 꼬집어 베이글 모양을 완성해 준다. 혹시 이 설명을 듣고 어떻게 하는지 바로 눈치를 챈 분이 있다면, 박수. 눈치와 센스가 대단하십니다. 사실 내가 쓰는 글은 레시피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서 떠올리는 내 잡생각이 주가 된 일종의 자기 명상 같은 글이라 설마 이 글을 가지고 정말 만드시는 분은 없겠지만 해 먹고 싶다,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신다면 유튜브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유튜브 슨생님들 어찌나 좋으신 분들이 많은지 말입니다. 아유 말도 못 해요. 

베이글을 대량으로 만드는 가게에서는 주로 마찬가지로 방망이 모양으로 만들어 반죽을 길게 늘인 후 서로 반대방향으로 반죽을 꼬아 동그랗게 말아준 후 끝 부분을 다시 바닥에 고정시켜 밀듯이 꼬아주며 접는 방법을 쓰는 것 같다. 베이글 두 개를 동시에 그렇게 성형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는데 내가 하고 있는 방법보다 더 쉬울 것 같아 실제로 따라 해보았는데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역시 취미와 직업인은 다르다. 꼬아놓은 반죽이 쉽게 풀리려고 하는 바람에 예쁘게 꼬아진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해보는 것만큼 여실히 깨닫는 건 없는 듯하다. 가끔 생활의 달인을 보면 놀라운 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 직업의 종류를 떠나 볼 때마다 존경심이 차오른다. 오랜 시간 일에 몰두하며 만들어낸 본인만의 기술. 아마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더 좋은 방법으로,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실행하며 탄생한 달인들의 기술은 그 자체로도 경이롭거나 놀라울 때가 많다. 하지만 나에게 그 이상으로 크게 와닿는 건 직업 기술 자체보다 그 오랜 시간 몰두할 수 있었던 그들의 마음, 직업인으로서에 대한 존경심이다.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든 같은 생활 직업인으로서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인내하며 감히 달인이라 칭할 수 있는 경지의 기술까지 연마하게 된 성실함에 대한 존경심. 아마 나한테 가장 부족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느끼는 존경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연차가 쌓이고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며 어떤 특정 직업이, 어떤 직급, 위치가 부러운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직업이든, 어떤 직급이든 오롯이 내가 갑이 되는 일은 없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롯이 어떤 것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부당하다고 여겨진 일들에 대해 생긴 일종의 콤플렉스로 비롯된 생각인 것 같다. 다만, 요즘 내가 가장 부러우면서도 내가 지향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사회인, 직업인으로서의 목표는 이런 생활의 달인들이다. 오랜 시간과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가는 사람. 콤플렉스든 돈이든 환경이든 모두 다 이미 초월한 상태에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자신의 주변을 안정되게 지켜나가는 사람들. 과연 이번에는 이 마음을, 이 목표를 잘 지켜나갈 수 있을까?


 주로 만드는 베이글 모양. 반죽을 꼬는 방식의 성형은 이 날의 블루베리 베이글 이후로 도전해보지 못했다. 요거 하나빼고는 다 똥망했기 때문이다.
반죽의 속을 채워 말아주면 이렇게 색다른 베이글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할라피뇨&치즈, 토마토 소스 등을 넣어 보았다. 


성형을 마치고 나면 다시 한번 반죽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쉬는 시간을 가진다. 이때 오픈을 예열하고 베이글을 데쳐낼 준비를 한다. 이 과정이 사실 꽤 귀찮은 일이라 베이글 만들기가 꺼려질 때가 있는데 베이글을 더 이상 크게 부풀지 않기 위해 해주는 작업이라는 설명을 들은 것 같다. 너무 뜨거운 물이 아닌 적당히 데워진 물에 꿀이나 설탕을 넣고 베이글을 30초 이내로 짧게 담궈 앞뒤로 데쳐준 후 오븐으로 옮긴다. 너무 긴 시간으로 베이글을 데치게 되면 질겨진다고도 들었던 것 같다.(모두 유튜브 선생님들의 말씀이다.) 좀 귀찮긴 하지만 먹음직스럽게 삶아진 모습으로 오븐으로 하나씩 들어가는 베이글의 모습을 볼 때면 촉촉한 베이글의 모습에서 맛있는 베이글의 결이 느껴져 절로 식욕이 돌 때가 있다. 이때부터 맛있는 베이글을 기대하게 되는 두근거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계랄까?


뭔가 맛있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 들지 않나요? 나만 그런가?


이제 200도 정도의 오븐 속에서 15분 정도 기다려주면 베이글이 완성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요즘 얼마나 맛있는 빵이 많고 얼마나 맛있는 베이글이 많은가? 그러나 막 만들어진 빵을 바로 먹는 것만큼 맛있는 순간이 있을까? 이 순간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 빵을 만들게 되지 않나 싶다. 일반 요리와는 다르게 빵은 뭔가 기대 이상으로 나를 만족시켜 주는 부분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작은 성공 경험을 만들어주는 느낌? 내가 한 것이라곤 죽어라 반죽한 것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대단한 것이 만들어진 느낌. 나 스스로에게 이런 경험이 필요한 시기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빵을 만드는 건 그렇게 또 하나의 치료제가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베이글의 모양들. 뿌듯함이 차오른다. 


만든 베이글은 요즘 만들고 있는 다양한 후무스들과 함께 찰떡궁합을 자랑하고 있다. 후무스를 그냥 찍어먹기에도 좋고 후무스와 어울리는 속 재료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일단 일반적인 샌드위치보다 더 든든한 느낌이랄까? 후무스를 먹는 입장에서 보면 피타 브레드 같은 얇은 빵에 얹어 먹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고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기도 하지만 베이글만큼의 포만감이 드는 느낌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베이글 샌드위치를 훨씬 더 많이 만들어 먹고 있고 깨만 간단히 얹은 플레인, 어니언 베이글은 점심, 저녁 식사 위주로, 과일을 넣은 블루베리, 무화과 베이글이나 속에 재료를 채워 넣는 할라피뇨, 피자 베이글 등은 크림치즈와 짝꿍을 맺어 아침 식사로 먹곤 한다. 후무스나 베이글이 짝짜꿍이 잘 맞는 건 이렇게 다양한 재료의 베리에이션이 좋기 때문인 것 같다. 각종 후무스 만들기에 빠져버린 내가 그 후무스에 어울릴만한 베이글을 떠올리며 시도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가끔 괴작이 탄생하기도 하지만 나름 에너지가 샘솟는 재미있는 일과가 되어버렸다. 맛의 좋은 궁합을 상상해 보고 만들고 난 후 정말 그 궁합이 찰떡일 때의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 '역시 난 맛잘알이야.'라면서 홀로 어깨를 들썩이는 내가 우습지만 그렇게라도 즐거움을 찾는 내 모습이 요즘은 견딜만하다. 

최근 또 하나의 도전 목표가 생겼다면 그건 '발효 베이글'이다. 이전 직장의 동료와 함께 퇴사 전 함께 가게 된 베이글 집인데 이곳에서 발효 베이글의 매력을 제대로 알아버렸다. 이것에 도전하려면 르방을 만들어야 하는데 벌써 한 3~4번 포기하고 실패한 르방 만들기가 이번엔 제대로 될까 싶다. 이거 꼭 해보고 싶은데...! 오래간만에 투지에 불타는 일이 생기는 것인가? 우울함과 무기력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겠다던 내가 발효 베이글에 도전의식이 생기다니. 도대체 무엇이 너를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하리사 후무스 찍어먹기, 미소 된장을 넣은 후무스에 우엉칩을 올려 샌드위치를 만들어갔다. 백태로 만든 단호박, 두부된장 후무스랑도 잘 어울렸다.
서울역 근처 베이글 가게 '더 모닝스'. 참 내가 꼭 해보고 싶던 '아침'을 파는 가게를 하고 계신 걸 보고 정말 부러웠다. 남다른 발효 베이글의 표면을 보시라.


정말 무기력함을 베이글의 홀 속으로 모두 날려버렸는지 몰라도 베이글을 만드는 일도,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도 하나씩 미션을 해내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 쥐어짜 내듯 억지 노력을 태우고 있는 거라 아주 잠시 동안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고 또 어떤 사건이 나를 끝도 없는 무기력의 세계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돌처럼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있는 건 못할 짓이다. 일어나야 한다. 자꾸 나를 밑으로 끌어내리더라도 나는 일어나야 하겠다. 내가 뭐 큰 일을 이루겠대?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이 무서운 세상아.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 '에에올'의 조이만큼의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모든 허무함, 무기력함과 함께 나를 깜깜한 곳으로 쳐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지배하고 있는 건 같지만 다정함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나 역시 그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 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 해야 한다는 마음이 어느 날은 무거운 책임감과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돌아서 또다시 나를 불안함으로 내몰아내기도 하지만 마음이 향하고 있으니 언젠가 보여줄 기회를 주실 것을 믿는다. 꼭 기회를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한다.

그래 나를 둘러싼 허무함이 나를 바닥까지 끌고 내려가는 그 안에서도 여전히 나는 가느다란 희망의 끈과 좋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런 기대감 따위를 갖는 것조차 근거 없는 낙관인 것 같아 부끄럽긴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잘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후회하지 않을 만큼 주어진 것에 열심을 다하고자 했음을 안다. 나를 움직이시는 그분 역시 아시리라 믿고 있으므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기도로 그저 구할 뿐이다.


봄이다. 봄이 오고 있다. 따뜻한 봄이 오고 있어서 그런지 다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움튼다. 나 역시 나에 대한 희망이 다시 조금씩 움트고 있다.



마지막 맞춤법 검사를 하고 저장 버튼 하나를 잘못 눌러 4시간에 걸쳐 길게 써둔 글을 모두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제대로 블랙홀 속으로 모든 걸 날려버렸다. 말도 안 돼. 제목 따라간다더니...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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