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니 정원지기에게도 조금의 여유가 생긴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밀린 정원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시작하며 1년 차
흙을 밟고 살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이 생긴 기쁨이 밤잠을 설치게 했을 정도다.
무엇을 심고 어떻게 가꿔가야 할까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고 정원밑그림을 그리곤 지우 고를 반복한다.
2년 차
눈을 뜨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마당 채울 생각에 한창이다. 계획에도 없었던 나무와 꽃들을 들이며 장날 새롭게 보이는 꽃들에 매료되기도 한다.
3년 차
중구남방으로 심은 나무와 꽃들이 조금씩 자라면서 부조화스러운 면이 보여 뽑아내기도 하고, 자리배치를 다시 해 본다 (이 점은 정원을 가꾸는 한 계속되어야 할 일임을 배우게 된다)
4년 차
계절마다 적당한 식물이 무엇인지 조금씩 감이 온다. 3년 동안은 열심히 심고 조금씩 자라는 재미에 하루가 바쁘다. 아침이면 어제보다 달라진 모습이 조금씩 보이게 된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며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생명의 신비, 자라남의 경이로움을 감사하게 된다. 특히 마당 텃밭에서 작물을 수확할 때면 뿌릴 때의 욕심보다는 키워가는 겸손함과 거둘 때의 고마움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작은 농부로서 시작해 보는 땅과의 교감을 키워간다.
5년 차
조금씩 배워가고 있음을 실행이라도 하듯, 옮겨 심고 다시 심고, 더 나은 보금자리를 찾아주려고 부지런히 옮기기도 한다. 식물들에게 적합한 자리인지 채 물어보지도 못하고 정원지기의 눈에 맞춰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
6년 ~ 7년
심은 것 못지않게 파내어 버리는 것도 많아진다. 이웃들에게 나눔도 하고 집안에서 키우기에 너무 큰 아이들은 공원으로 이주시킨다. 벚나무 몇 그루가 공원으로 이사를 했다. 집 앞 작은 공원으로 이사한 벚나무와 양팔을 넓게 뻗친 미니사과나무, 그리고 단풍나무와 칠자화 한그루는 제법 자리를 잡았다.
8년째
채우는 것보단 비워가는 여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떠나는 생명들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도 조금은 내려놓는다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마당에선 때론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삶과 죽음은 떨어질 수 없는 친구 같은 존재라는 것을 실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
작은 책 제목을 정원 가꾸기 마음 가꾸기 그림일기라 붙였을 때는 수련의 의미로 뜻을 두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정원 가꾸기가 늘어갈수록, 정말 정원을 가꾼다는 일은 마음고랑을 다듬고 일구고 가는 일이란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정원 가꾸기가 익어갈수록 마음 가꾸기도 조금씩 성숙해짐을 배운다.
농사지으시는 분들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데크에서 고양이들의 재롱을 보며 잠시라도 쉬고 있을 때면 여차 없이 살랑거리는 꽃들 사이의 풀들과 뽑아도 뽑아내도 제 의지대로 다시 살아 올라오는 잡초들이 눈에 띈다.
한두 번 뽑아내서 될 일도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일어나 뽑으러 간다.
때론 그냥 둠이 나은데도 말이다.
정원을 아름다운 꽃들로만 채우기 힘들어 꽃나무들을 많이 심은 편이다.
화려한 봄의 전령이었던 하얀 목련과 눈부시게 희고 부드러운 살색을 자랑했던 모란꽃, 하늘거리던 안개꽃나무, 꽃분홍 밥알꽃이 서러웠던 박태기나무, 봄을 더 길고 아름답게 빛내주었던 산딸나무와 서부해당화는 무성한 잎으로 덮여 벌써 몇 번은 잘라준 것 같다. 삼색플라밍고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것을 그대로 두면 감당 못할 정도로 자란다. 상고머리 쇼트커트로 잘라준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 덥수룩한 머슴아 머리다. 가위를 요구하고 있다.
봄꽃나무는 내년을 준비하고 있지만, 이제부터 여름을 밝혀 줄 배롱나무와 칠자화는 꽃 몽우리를 보이며 자랑스레 얼굴을 들고 있다. 조금씩 물들어 가는 청단풍나무, 보랏빛 열매가 조금씩 익어가고 있는 좀 작살나무는 지금부터 긴 여름과 가을을 준비해 준다.
꽃나무든 유실수든 꽃처럼 세상이치는 모두 같다.
피어나려 할 때의 설레는 마음, 주변에 나눠주는 기대감, 그것 만으로도 보람찬 시작은 충분히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의 무릎 안에 있을 때 이미 효도를 시작한 것처럼...
활짝 피기 시작하면 옆에선 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옛말처럼 진다고 서글퍼할 일도 전혀 아니다.
"피고 지고"는 분리된 말이 아니라 어쩌면 한 단어고 한 몸이다.
그에 딱 어울리는 장미는 여름 내내 조금씩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도 안젤라 고운 빛은 눈물을 머금은 채로 활짝 피었다. 몇 송이 꽃을 피우고 졌던, 외목대 골든 셀레브레이션 노란 아이도 어느새 새로운 얼굴을 다시 내밀었다. 비가 내려도 상관없다는 듯 "나를 보면 힘이 나지요!"라고 말하며...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며 다시 피는 장미, 모진 가시 속에도 사랑받는 이유가 이런 매력 때문아닐까.
백합은 큰 입을 활짝 벌리며 "가시밭에 한송이"가 아니라 정원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합창교향곡을 빗방울 반주에 맞춰부르고 있다. 커다란 목청에 담겨 잘 씻겨지지도 않는 꽃가루는 온 마당으로 퍼진다.
올해는 백합의 수술과 암술을 잘라준다. 그래야 영양분 손실이 안되어 알뿌리가 튼튼해진다고 했다. 손으로 좀 꺾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찐득거리고 노랗게 물든다.
안타까운 점은 분명 흰 백합이었는데, 어째 노리끼리하게 물들어간 아이가 많다. 아마 벌들이 노란 화분을 옮겼나 보다. 아주 하얀 백합이 작년엔 제법 있었건만 올해는 앞정원에선 없다.이것도 정원의 묘미라고나 할까...
돌보는 이가 있어도, 정원은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침이면 노래하며 꽃들을 깨우는 새들과 부지런히 꽃가루를 날라주며 자신의 영양도 섭취해 가는 벌들... 정원 숲 곳곳에서 날아다니는 고양이 꽃들도 큰 몫을 한다. 아기 삼냥이 녀석들은 가지를 부러트리기도 하며 구석구석 땅을 파고 볼일을 본다. 초목들이 좋아할 양분이나 될지 모르지만, 야단도 치지만 쫓아다니며 막을 수도 없다. 고양이꽃도 정원의 엄연한 일원이기 때문이다.
매사에 공평하고 너그러운 자연은 움직이지 못하는 초목들을 위해 비도 내려 준다.
모처럼의 비와 바람에 흔들리며 탱고를 추는 초목들의 심정을 다 알진 못해도 지금 즐거워하는 것은 맞다. 움직이는 꽃들도 비를 피해 각자의 처소에서 초목의 댄스를 감상하며 자연이 주는 위로와 쉼을 나누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