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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Jun 14. 2024

영원의 숲 #17

"우리가 행복한 자리"




  나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왜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는지를 물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행복회로의 방법론에 따라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행복회로를 구성하기 위해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말한다. 그 다름에 자신의 행복이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서브웨이에서 빵과 속재료를 고르듯이 자기만을 위한 맞춤형의 행복에 대한 알고리즘이 있을 것이라고, 그걸 아직 찾지 못해서 또는 아무도 자신에게 제공하지 않아서 자신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행복회로를 추구하는 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경험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것을 경험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은 특별한 가치를 지녀야 하는 당위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희소하고 유일하며 보물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경험한 자기 자신은 심지어 독보적인 개척자고 전문가며 해방자다.


  남들과 다른 것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진 것만 같은 특별한 정체성, 그것이 마치 행복을 얻을 자격처럼 상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에게 특별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남들은 하지 않고 자기만 하는 것 같은 경험을 잔뜩 소비하고자, 자기 몸에도 맞지 않는 옷과 신발을 사고, 자기만 발견하도록 운명지어진 맛집을 찾아 거리를 순례하며, 세상 다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대중인문학서에 나오는 용어들을 암기하고 다닌다.


  SNS에서 최근 힙하다고 유행하는 것들을 따라 그렇게 한다.


  남과 가장 다르기 위해 남과 가장 똑같은 것을 한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이 미로를 헤매기만 하는 길이라면 그 길은 틀린 길이다.


  오늘날은 자신이 틀렸다는 말에 과도한 공격적 의지로 반응하곤 한다. 마치 자기는 틀릴 일이 없는 가장 완벽하고 무오한 고성능의 인공지능이기라도 된다는 듯이.


  그런 이들의 엄마아빠가 그 말이 다 맞다고 해주었는지는 몰라도, 또 혹여나 80억의 인류가 다 동의하며 지지해준다 할지라도, 틀린 것이 맞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다.


  행복은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틀림의 문제다.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그 몸이 행복하다. 틀리면 행복하지 않다. 아무리 행복회로를 돌려도 몸이 병들고 마음이 힘들다.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 행복한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이미 잘 안다.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틀린 것을 포장해봤자 자기 자신을 속이며 괴로워지는 일일 뿐이다.


  아 내가 틀렸구나, 그래서 삶이 답답하고 힘들었구나, 자신에게 정직한 이는 그렇게 바로 미로의 막힌 길로부터 돌아나올 수 있다.


  돌아나오는 길은 오히려 쉽고 빠르다.


  몇 번 돌아나오면 우리는 어느새 미로의 바깥에 서있게 된다.


  이 미로로 들어가서 자신만의 진정한 길을 찾아내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허위문구가 써진 그 미로의 입구 앞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우리는 처음과 똑같이 자유롭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그 사실 위에 앉아 있을 때 이제 동산에 불어오기 시작하는 바람이 바로 행복의 기운이다.


  그동안 우리는 마치 테세우스라도 된 것처럼 영웅신화에 빠져 인생의 미로를 현명하게 통과하면 그 끝에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은 소재로, 남들과 다른 놀라운 경험이라는 것을 또한 추구했던 것이다. 그 특별해보이는 것들을 얻어야 미로에서의 성공적인 길을 묘사하는 행복회로가 잘 돌아가 행복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바로 그것이 틀린 것이었다고 나는 재차 강조한다.


  미로의 과업을 성취하고 행복을 이루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론이 있다며 행복회로를 구성하려고 할 때, 실은 그 행복회로가 바로 미로의 정체다. 그러니 행복에 대한 방법론을 찾으며 또 추구할수록 미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행복도 아주 요원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미로를 성공적으로 완주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미로 자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행복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 근원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속이며, 미로에 들어가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미로의 입구마다 써놓고 다니던 어떤 주체가 분명 있다. 갈등을 극복하고 과업을 완수해야 그 보상으로 행복이 얻어진다며 영웅신화의 구조를 보급하던 이야기꾼들이 그 주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최고의 이야기꾼은 바로 우리의 좌뇌다.


  좌뇌는 우주의 모든 것이 정합적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이야기를 짜내는 것이 주임무다. 실재와 다르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이야기가 문법적으로는 '맞는 것'처럼 보일 논리회로만 성립될 수 있으면, 즉 이야기가 이야기일 그럴 듯한 인과구조만 갖출 수 있으면, 그것은 좌뇌에게는 실재보다 더 큰 권위로 행사된다.


  어떠한 현상 내지 사물이 사실적으로는 '틀린 것'이라도, 좌뇌는 이야기를 통해 가상현실을 만든 뒤 그것은 논리적이고 인과구조에 부합하기에 '맞는 것'이라는 협잡을 시도한다. 그리고는 거기에 '다른 것'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며, '틀린 것'을 아주 교묘하게 '맞는 것'처럼 만들기 위한 사기를 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오늘날 자주 일어나는 일이며, 좌뇌라고 하는 이야기 사기꾼이 우리 자신을 속이는 주된 방식이다.


  애초부터 틀려먹은 '미로'에 우리가 진입하게끔 조장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이 시대의 많은 경우 좌뇌에 끌려가고 있는 이들은 자신을 이렇게 항변하곤 한다.


  자신은 오해되는 것처럼 단순하고 유치한 논리회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지성, 의지 등의 요소들이 통합된 전인적 기제로 살아가고 있다고.


  이러한 이들의 말처럼, 가만히 멈춰서 잘 느껴보며, 그 느낌이 말해주는 것에 따라 총체적인 지혜를 얻은 뒤, 그것을 삶에 적용해 자신의 길을 열어간다고 하는 방식이, 바로 좌뇌라고 하는 이야기꾼에게 끌려가고 있는 그 방식이다.


  자기 자신을 무슨 수맥탐지기 같은 것으로 설정한 다음, 탐지기가 수집하는 정보들을 빠르게 통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고급의 프로세스 능력을 체화하게 되면, 결국 현명하게 미로의 길을 찾게 될 수 있으리라는 이 생각은 바로 좌뇌에 고착된 전형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자신의 삶이 어떤 이야기라고 착각하며 펼쳐낸 미로놀이에 빠져있는 상태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삶은 이야기 밖에 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온전하다."라는 이야기의 교훈적 명패가 달린 좌뇌의 새장에서 벗어나야 빛으로 흐른다. 연주로 흐르며, 창조로 흐른다.


  그 흐름을 타고 그동안 세상에 없던 가장 놀라운 것, 바로 '자신으로 태어난 행복'이라는 것이 비로소 펼쳐진다.


  하이데거는 『숲길』에서 이렇게 말한다.


  "숲에는 대개 풀이 무성히 자라나 더는 갈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들이 있다. 그런 길들을 숲길(holzwege)이라고 부른다."


  숲길은 실은 길이 아닌 길.


  정해진 알고리즘이나 형식이 아닌 길.


  이야기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길에서 벗어난 길.


  우리는 미로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로를 벗어난 자리가 바로 길이다.


  정확히는 길이라는 것은 없지만 우리는 들어선다. 숲길로.


  행복하고 싶어서.


  좌뇌의 정합적 논리회로가 만들어낸 '길'이라는 이름의 미로 밖으로 나와, 바로 행복해지고 싶어서.


  우리가 숲길로 향하는 이유며, 행복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그리던 이 앞에서 이제 숲길이 열린 이유다.


  우리는 영원히 행복하라고 이 세상에, 이 영원의 숲에 왔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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