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 속에 살아남기 #1

"숲길의 심리학"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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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holz)은 숲(wald)을 지칭하던 옛 이름이다.
숲에는 대개 풀이 무성히 자라나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 길들이 있다.
그런 길들을 숲길(holzwege)이라고 부른다.
길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같은 숲 속에 있다.
종종 하나의 길은 다른 길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뿐이다.
나무꾼과 산지기는 그 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숲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숲길』 中




1979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다들 어떻게든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관심을 쥐어짜내려고 한다. 옷을 잘 입거나 반대로 옷을 홀딱 벗고, 아주 지적인 재간을 부리거나 반대로 위악적인 바보흉내를 내며, 또 화려한 성공의 빛을 자랑하거나 반대로 파멸의 과정을 전시해가며, 자신에게로 '좋아요'의 개수를 수집하려고 한다.


그렇게 자기에게 잠깐 관심이 쏠리면 그때는 의욕이 샘솟는다. 잠깐 신나서 열심히 한다. 그러다가 당연한 수순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멀어지면 이제는 활동의 동력이 끊긴다. 무기력한 침대생활자가 되어 알 수 없는 짜증을 달래기 위해 유튜브나 보며 하루를 지새운다. 오늘날 만성적인 우울증의 형태다. 청년들만 그런가? 아니다. 지금 모두가 그러하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 말은 어떤 의미로는 맞고 어떤 의미로는 틀리다. 하고 싶은 것이 '관심받는 것' 밖에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시도해보든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 같으면 금세 의욕이 사그라든다. 어물전에 진열된 동태눈깔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걔네는 움직이며 썩은내를 여기저기 풍기고 다니지는 않기 때문에.


관심종자라고 이제는 부르지 말자.


관심좀비.


우리는 이 치명적 전염증이 세상을 휩쓰는 아포칼립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저항이었다.


무관심 속에 길고양이도 탐내지 않을 썩은 동태처럼 죽어가고 싶진 않다고 우리는 울부짖고 있던 것이다. 도심을 가득 메운 좀비의 신음소리는 분명 그러한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살아남고 싶다. 지구를 가득 메운 이 유독한 무관심의 대기 속에서 어떻게든 미래를 꿈꿔보고 싶다. 내일의 내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


사랑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힘, 우리에게는 분명 그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얻는지를 모른다.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를 모른다. 무관심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도시문명의 밝고 화려한 빛 속에서는 막 피어난 사랑도 희미해질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포스트록 밴드 모과이(Mogwai)의 명곡인 'Take Me Somewhere Nice'에서는 이러한 가사가 나온다.


"Try to be bad(나빠져볼게)."


착한 마음, 예쁜 세상, 좋은 사람들, 도시의 강한 광원은 이러한 소꿉놀이의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이것은 도시의 꿈. 이 꿈을 실현해가는 이가 있다면 도시는 더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의 세례를 그에게 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모두는 카메라 앞에 섰다. 대항해시대에 이은 대미디어시대가 열린 것이다. "찾아봐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곳에 두고 왔다."라는 위대한 언약을 믿고서 사람들은 휘황찬란한 조명들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는 바다로 뛰어든다.


누가 알았을까. 그것은 오징어잡이를 위한 설정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오징어게임이다. 참가자는 포획자가 아니라 포획물이다. 쭉쭉 뽑아먹혀 영혼까지 메마른 뒤 잠시 후 어물전에 전시될 것이다. 차드의 영압이 사라졌는가? 영혼을 잃고 마른 오징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관심은 영혼의 가뭄이다. 영혼이 메말라서 일어나는 기근의 현상이다.


영혼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으면 마음이라고 써보자.


마음이 생기를 잃어 건조하고 냉담해질 때 무관심은 생겨난다. 현상학에서 또 불교에서 말하기로 마음의 근본작용은 관심이다. 마음과 관심은 애초 분리될 수가 없다. 마음은 관심으로 생겨나며 관심으로 완성된다. 그런 즉, 마음이 무관심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의 근본부터가 지금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파괴는 시작되었다. 착한 마음, 예쁜 세상, 좋은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꿈꾸던 도시문명의 횡포다. 자기 생각대로 안되면 '선함의 이름'하에 모든 것을 다 때려부수고자 하는 소꿉놀이자의 폭력이다.


세계에 무관심이 만연해 그것을 구원하겠다고, 우리가 관심을 집중해 너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스포트라이트의 빛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온세상을 소꿉놀이장으로 만들기를 꿈꾸던 스포트라이의 강한 빛이 저 살아있는 초록빛의 뿌리를 메마르게 만들어 무관심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모과이가 노래한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좀 나빠지자며. 까맣고, 더럽고, 못난 이가 되어야 우리는 아마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며.


숲.


초록빛의 생명은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숲을 기억하며 그리워했다.


까맣고, 더럽고, 못난 그 숲에서, 생명은 생명일 수 있었다. 까맣고, 더럽고, 못난 그것이 생명에게 생기를 불어넣으며 생명을 살리고 있었다. 까맣고, 더럽고, 못난 바로 그 흙이 그 안에서 생명의 뿌리를 키우고 있었다.


까만 마음, 더러운 세상, 못난 사람들은 그래서 예로부터 숲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자신을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는 그 선한 빛의 폭력에 시달리며 자신을 잃을 위기에 처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숲을 찾았다. 그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해, 그 자신으로 다시 한 번 살아보기 위해, 숲의 흙을 밟으며 흙과 접촉했다.


흙은 고전적인 상징. 바로 몸에 대한 은유다. 그리스도교는 이 은유를 효과적으로 쓴다. 몸은 악하고 더러우며 수준낮은 것으로 치부되었으나, 그리스도교는 말한다. 바로 그 몸이 되고자 신은 이 땅에 내려왔다고. 흙에서 태어나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될 그 인간의 몸을 위해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이처럼 흙은 인간의 몸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뜻하고자 하는 아주 정통적인 상징이다.


그렇다면 또 한 번 분명해진다.


자신의 몸이 귀하다는 것을 망각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 무관심이다. 세간의 관심을 얻어내려고 자신의 몸을 도구로 굴리다보니 몸은 가장 부정되었고 시들어갔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한 바로 그 일이 정확한 무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무관심을 시작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무관심의 지옥 속에 방치되고야 말았다.


우리는 이제 이 모든 것을 돌이키고 싶다. 되돌리고 싶다.


우리는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 흙이 키워낸 그 성대한 초록빛의 연회장으로. 우리가 참되게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그곳으로.


요청되어야 할 것은 숲을 향하는 길로 들어서고 싶은 그 마음의 소망을 안내하는 지도, 또는 지혜.


바로 '숲길의 심리학'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누가 관심이 있겠는가. 제목도 고루하고, 환하게 착해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힙해보이는 재미가 없다. 어디 뒷방늙은이가 쓴 책인가, 하이데거의 사진도 같이 보면 그 생각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무관심 속에 살아남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을 선정적으로 자극하거나, 사람들에게 참신한 재미를 주거나, 또 이러한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을 위한 도움이 되는지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선전할 능력이 없는 무능력한 이라면, 아니 애초 그러한 것을 하고 싶지 않은 까맣고, 더럽고, 못난 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큰 제목과 작은 제목을 바꾼다. 『숲길의 심리학』의 '무관심 속에 살아남기'가 아니라, 『무관심 속에 살아남기』의 '숲길의 심리학'으로.


이것은 근접거리의 문제다. 어느 것이 더 내 자신에게, 즉 내 몸에 더 가까운 현실인가. 나는 오늘 '숲길의 심리학'이라고 하는 더 큰 것을 구상하고 그 일부의 현상을 묘사하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 속에 살아남기'라고 하는 더 가까운 것만을 충분히 다 말하고 죽을 것인가. 전면에 세워야 할 것은, 근접거리에 있는 것이다. 미래에 완성될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다.


내 자신은 내년에 결코 보지 못할 꽃잎들의 축제를, 그리고 그의 미소를 위해 오늘 벚나무를 심는 것도 지금의 나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미래는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이를 위해 열려가는 것이다.


내 자신이 정말로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하고 있던 것과도 같다.


그리고 이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하려 하는 동안 우리에게서 회복된 것은 바로 관심이다. 우리는 분명 물음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평소에는 갖지 않던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재 우리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또 그것들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바로 우리 자신의 지금을 이해하게 된다.


세상에 아무도 이딴 책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나만은 분명하게 관심으로 이 자리에 서있었다.


이 세상에 나만은 나에게 아주 관심이 많았다.


숲길로 들어선 것이다.


큰 제목과 작은 제목이 바뀌면 이제 글의 전체 방향성이 달라지듯이, 숲길로 들어서면 삶의 질감이 달라진다.


글을 쓰다 수려한 문장이 잘 안떠오르고 힘들어지면,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정신을 집중해서 적확한 단어들을 더 깊이 떠올려보는 대신에 냉장고 안에 있는 명란젓을 떠올릴 것이다. 밥 위에 참기름을 뿌리고 대충 비벼먹으면 맛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아무리 잘 쓴다고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배고픔에 나만은 분명히 관심가질 수 있다.


근접거리에서 계기들은 더욱 분명해진다.


나를 향해 방향을 정향할 그 계기들. 글도 실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도 다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다 나를 향할 계기들. 나를 향한 관심을 시작할 계기들.


모든 길은 끊기거나 흩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같은 숲 안에 있듯이, 그렇게 모든 길은 다 숲으로 통하듯이, 모든 길은 다 나로 통하고 있던 것이다.


숲은 내가 되어가는 곳.


숲길은 내가 걸어감으로써 길이 되어가는 나의 길. 나를 만나고자 시작한 그 길.


사방이 다 막힌 속에서 유일하게 열린 길이며,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 무관심 속에서의 관심이다. 바로 이것으로 우리는 살아남는다. 숲길의 심리학으로, 나를 향한 관심의 마음으로, 이제 시작된 그 사랑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깊은 숲속 작고도 영롱한 그 꽃을 피워낸 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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