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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과 행복

"진격의 불행"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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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행복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이 아니다. 행복은 실존의 목표가 아니다. 즉, 행복은 실존이 마치 궁극적인 완성점처럼 설정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모종의 종착역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실존은 행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서 출발한다.


틸리히는 이를 에덴동산의 비유로 묘사한다.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상징되는 온전한 낙원에서 출발한 것이지, 아직 가본 적 없는 낙원을 막연히 꿈꾸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때문에 실존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힘으로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인간이 우주공간을 산소로 가득 채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불가능한 일이며, 불필요한 일이다. 산소가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산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이처럼 실존의 행복론은, 행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즉, 행복은 우리에게 이미 확보된 것이지, 아직 결여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가, 망각하고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행복은 우리의 기본 상태다. 즉, 가만히 있으면 원래 행복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행복감을 체험할 때를 살펴보면, 어떠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 아니라, 그 일이 완수된 후에 행복감을 체험하게 된다. 이를테면, 하루 종일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오늘 하루도 충만하게 살아낸 것 같은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생겨난 행복이 아니라, 분주하게 있다가 비로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찾게 된 바로 그 행복이다.


때문에 열심히 노력한만큼 행복해진다고 하는 말은, 실존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착각이다.


그 착각은, 가만히 있는 상태가 못난 상태며, 저 멀리에 있는 행복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상태가 잘난 상태라고 하는 착각이다. 즉, 행복의 성취가 개체의 우열성에 달려 있다고 하는 착각이다. 또한 행복의 자격이 조건부라고 하는 착각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실존에서 묘사하는 행복은 우리 모두의 기본 상태다. 즉, 우월함이나 열등함의 조건과 아무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행복이라는 표현을 온전함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묘사한다면, 이는 더 적절한 이해가 된다.


온전하다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0의 감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0은 +도 -도 아니다. 즉,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것이 0이다. 이미 그 자체로 고유하게 완성되어 있는 것이 0이다.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던져진 그대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존재다. 존재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결핍되어 있지 않다. 존재는 문제가 아니고, 잘못이 아니다. 곧, 존재는 온전하다. 이미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즉 실존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이 온전함이야말로 실존의 출발점이다. 온전함이 행복의 실제적인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처럼 행복은 분명한 실존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저 먼 곳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때, 그것은 실제로는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극을 위한 것이다. 자극은 쾌락이며 동시에 고통이다. 그래서 이 부단한 노력의 길은 결국 행복이 아닌 쾌락을 위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 쾌락과 함께 더 많은 고통을 얻으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행복과 쾌락은 전혀 다른 것으로서 그 경계가 명확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려지는 의미있는 역설은, 우리가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자극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온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하지 않다면, 즉 우리가 문제만이 가득한 잘못된 존재라면, 우리는 자극을 추구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자극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시 한 번, 우리의 기본 상태가 0인 까닭에, +의 쾌락의 방향으로든, -의 고통의 방향으로든, 자극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가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온전함이라는 것을 또 다시 심심함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본다면, 이 또한 유용한 이해를 제공해준다. 심심하니까 자극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가 아닌 것을 스스로 문제인 것처럼 만들고, 또 그 문제를 유능하게 해결해내는 방식으로, 이 심심함에서 야기된 자극의 생산 및 소비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자극의 소비를 끝낸 후에는 다시 심심한 상태로 돌아오게 되며, 그 순간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 행복하다."


결국 우리는 온전함, 즉 심심함이 행복한 상태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방향성으로 쾌락과 고통의 자극을 더하든 간에, 결국에는 고무줄처럼 다시 행복한 0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떠올려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고 집에 누워 있을 때 "아,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상태와, 그렇게 계속 집에 누워 있던 중 결국 이대로는 못난 존재가 된다는 조바심에 쫓겨 밖으로 나가 특정한 활동을 이루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누운 뒤 "아,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상태에는 그 어떤 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 둘은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다.


애초에 부족할 것 없는 온전한 이가, 부족한 존재처럼 굴며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소재들로 부산하게 퍼즐놀이를 한 끝에, 결국 부족할 것 없이 온전한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연극과도 같다. 이미 행복한 이가, 불행의 각본으로 구성된 연극 속으로 들어가, 불행한 배역에 몰입해 열심히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연극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중요한 물음이다.


우리가 바로 불행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극을 통해 세상의 불행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착각 속에 망각함으로써 생겨난 불행이, 이처럼 세상에 많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누군가가 만든 뒤 그 스스로도 갇혀 있는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미로 속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그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그 미로에 갇힌 당사자의 입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그 미로의 주인에게 미로의 탈출구를 가장 구체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불행의 미로를 하나의 자극을 위해 만든 뒤, 자신이 원래는 행복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불행 속에 갇히게 된 미로의 주인에게, 그 역시도 우리만큼이나 이미 행복하다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불행에 관심이 많다. 불행한 모든 것이 행복해지는 일에 이토록 관심이 많다. 우리 모두가 원래 행복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에 이토록 관심이 열렬하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연기를 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다른 이의 행복을 함께 회복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옥에 있는 모든 이를 구하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간 지장보살의 은유이며, 필멸할 유한자의 몸을 친히 얻어 이 땅으로 육화되어 내려온 신의 은유이고, 사랑이 대체 어떠한 일을 하는지에 대한, 바로 그 직접적인 묘사다.


때문에, 원래 행복이 기본 상태인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다.


"아, 불행하다."


그렇게 불행을 체험하는 일이, 애초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가장 큰 사랑을 담아 매일매일 하고 있는 가장 신성한 그 일인 까닭이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출근을 할 때 "자, 오늘도 열심히 불행해지러 가볼까."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아침에 일어나 "자,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불행하게 살아볼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관계들 속에서 "자, 한번 이 사람과 같이 불행해져 볼까."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간에, 원래 행복한 0의 상태인 우리가 자극을 낳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행한 상태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행복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치 우리가 잘 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이 야기하는, 삶의 커다란 무게는 이 자리에서 바로 사라진다.


이것은 우리의 기본 상태다.


우리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만들어내는 이 경쾌한 웃음은, 실존의 기본 상태다.


자극은 자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마치 고무줄처럼 원래 우리 자신의 기본 상태인 행복의 상태로 우리를 다시 끌어당긴다. 이처럼, 행복이 그 자신에게로 조건없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이 고무줄 같은 중력작용 덕분에, 우리는 기꺼이 불행하고자 여행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복은 우리에게 이미 공짜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감히 행복해져도 된다. 우리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기꺼이 실감하며 받아들여도 된다.


"행복과 같이 좋은 것을 얻는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는 "노력과 행복은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내가 정말로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 등과 같이, 그동안 그렇게 조건부로 살아온 관성 작용에 따라 우리에게 야기되는 의심과 두려움은 우리를 거듭해서 자극의 현실로 내몰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좋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불행해질 자유도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행복할 자유가 행사되고 있기 때문에, 그 행복의 자유 속에서 우리는 또한 불행해질 자유도 행사할 수 있다.


다만 언제든지 우리가 행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우리가 결코 행복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만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모든 것일 뿐이다.


행복은 자유다. 곧, 행복은 공짜다(for free). 우리가 행복해지는 일은, 언제라도 지금 이순간 우리의 눈 앞에 자유롭게 열려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탕아의 비유로 묘사한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자유롭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뒹굴뒹굴하며 아무 것도 안하는 현실을 정말로 우리가 좋아했다는 것, 그 현실이 우리의 행복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습이 그 어떤 잘못도 아닌 가장 온전한 우리의 기본 상태였다는 것, 바로 이것들을 기억함으로써 동산의 향기는 그 즉시 우리에게로 찾아든다.


우리 자신에게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이 불행조차도 사실은 아무 문제없이 느끼고 있는 신기한 우리 자신이 있다는 이해가 그 향기와 함께 밀려온다.


그렇게 우리는 온전하다. 온전해서 오늘도 힘차게 외친다.


"자, 불행하러 한번 가보자!"


불행의 진격이 시작된다.


가장 온전한 자의 진격이 시작된다.


우리 모두가 이미 행복하다는 사실을 세상 끝까지 알리기 위한, 그렇게 세상 끝까지가 이미 에덴동산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한 실존의 중력작용이 지금 막 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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