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심리학의 약속"
이 연작글의 가장 처음에서 우리는 "왜 종교심리학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물음은 분명하게 종교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어떠한 것인지 그 실체적 정의를 요청하는 물음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을 묻는 물음 앞에 우리는 호모 렐리기우스, 곧 종교적 인간을 대답하고 있었으며, 또 종교적 인간으로서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종교적 인간인 이상, 이 대답은 불변의 정답처럼 고정적인 것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종교가 향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깊이이며, 그 깊이에의 탐구는 언제나 <과정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삶이 처한 현재에 따라 그에 응답하려는 방식으로 대답은 늘 달라질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종교적 인간이라는 의미는, 인간은 늘 변화해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종교적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그 어느 묘사보다도 더욱 이 변화성을 지향합니다. 다른 말로는 유연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이는 인간이 진화해온 방식이자, 진화를 통해 인간이 체득한 아주 아름다운 특질에 대한 이해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자연사에서도 유례없는 놀라운 적응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적응의 천재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놓인 그 조건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인간 자신을 위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두꺼운 가죽이나, 날카로운 이빨, 선천적으로 강인한 근력을 갖지 못한 것은, 그것들 대신에 다양한 상황들에 맞추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적응력을 택했던 까닭입니다. 그러니 실은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지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흔히 사용되는 종교적 용어로서, 내려놓음, 공함, 자기비움 등의 표현들에 대해 우리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특정한 종교적 현실을 위한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원래 다 이와 같이 [빈 손의 존재]입니다. 손이 비어있기에, 그 손에 유용한 도구를 잡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품에 끌어안을 수도 있으며, 또 하늘을 향해 인사를 건넬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향한 모든 열린 태도, 이것이 인간의 인간성을 묘사하는 참된 표현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태도로 인해 인간은 적응의 천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적응력이라는 것이 역량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일상적으로도 떠올려보면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회조직이나 공동체 속에서 힘들어하던 많은 순간은 우리가 적응력을 잃었던 순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능력함을 경험하게 되고,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며, 자신의 삶의 무의미성을 회의하게 됩니다.
종교는 이처럼 적응력, 곧 인간 자신의 본래적 역량을 상실하거나 망각한 인간이 그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종교적 표현 속에서 무소유 같은 개념이 제안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을 뺏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이 가진 순수하고 참된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윤리나 정치로 몰락해버린 종교가 아니라면, 종교의 모든 개념은 다 이 인간의 역량 회복을 위해 기능합니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루덴스, 호모 센티엔스 등, 인간이 다양한 형태로 인간 자신을 정의해보고자 하던 그 모든 시도는 그래서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된 어떤 환경에 대해 인간이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인간에게는 바로 그러한 역량이 있으며, 또 그 힘을 통해 지금 적응의 문제에 효과적으로 응답하고 있음을 묘사하던 표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AI의 발전과 더불어 이제 포스트휴머니즘, 나아가 트랜스휴머니즘까지도 논하고 있습니다. AI가 이제 우리의 삶에 전방위로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조건들은 당연시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체역량'과 같은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한 질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역량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발견하고 싶어함에 따라, 그렇게 결국 우리는 이 AI의 시대에 또 한 번 "인간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인간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 답이 바로 종교적 인간입니다.
이것은 "왜 종교심리학인가?"라는 물음이 답해지는 그 방향성과도 일치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인간이라고 정의해온 그 무수한 인간상과 그에 동반된 역할 및 기능들이 이제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AI에게도 속하게 된 오늘날, 우리는 AI에게 가장 불가능한 <종교적 마음>이라는 영토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적 마음>으로 사는 인간, 곧 <종교적 인간>을 우리 자신을 위한 자화상으로서 기쁘게 채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항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오딧세우스의 모험은 이 두 방향성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나아간다'라는 표현이, 더 좋은 상태로 발전한다는 의미와, 이전의 온전한 상태를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묘사해주듯이, 종교적 인간은 이 두 의미를 동시에 살아가며, 그것이 곧 <변화>의 의미들입니다. 변화 속에는 언제나 발전[성숙]과 회복[치유]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AI가 펼쳐가는 새로운 삶의 환경에 적응하고자, 인간이 종교성을 새롭게 그 자신의 대체역량으로 확보하게 되는 이 모습은 매우 즐겁고 흥미로운 역설입니다. 이것은 어느 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위대한 귀환>의 울림을 갖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본원의 뿌리로 돌아오는 것이며, 그만큼 더욱더 저 하늘을 향해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갑니다. 산들산들, 인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인사를 건네듯이.
그렇게 우리는 분명 나아갈 것입니다. 인간으로 회복되고, 인간으로 성숙됩니다. 인간을 다시 찾아, 인간을 향해 초월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우리를 위한 종교심리학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 또한 물론 <과정중>에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약속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의미입니다. 약속의 의미가 바래지면 다시 새로운 약속이 맺어지고, 인간은 자신을 지키는 가장 굳건한 힘 속에 언제나 위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반드시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가장 존귀한 존재가 있고, 그 이름이 바로 인간이라고.
내 자신이 바로 그 인간이었노라고.
우리 자신이 그토록 장엄하고 놀라운 존재라는 사실에 마침내 우리가 '적응하게' 되는 그 일상을, 그 약속의 날을, 무엇보다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합니다, 그것이 종교심리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