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자가 상담에서 하는 일

"실존해명"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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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이든 인지치료든 인간중심접근이든 간에, 우리말로는 다 '상담'이라고 불린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서로 대화를 통해 작업하는 활동이니, 그 뜻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디어와 대중심리학이 개입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상담이라고 하는 표현은 단지 활동의 구조적 공통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형적으로 표상되는 모종의 획일적 모델에 대한 지시어가 된다.


이를테면, "거짓말을 할 때는 왼쪽귀를 만진다." 등과 같이 인간의 행동원리에 대한 메뉴얼이 있고, 마치 영어사전을 외우듯 그 메뉴얼을 숙지해서 내담자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러나 그 과정은 성모마리아처럼 인자한 엄마로서 어떤 경우에도 늘 내담자에게 "그래그래."라며 동조하여 내담자가 지구에서 가장 편안한 정서적 요람에 누워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새 뚝딱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마법을 부려주는 신적 활동의 모델과도 같다.


이와 같은 모델을 수행하도록 기대되는 상담자상으로 곧잘 그려지는 것은 흡사 간달프나 요다의 모습이다. 또는 고운 중년이 된 메텔과 같은 인물이다. 대체적으로는 심리학자들의 목록에서보다는, 한국의 위인전에서 찾는 것이 더 용이할 인물상들이다.


결국 이러한 모델은 유능하고 자상한 부모의 모습을 상담자상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상담이라고 하는 활동은 내담자가 참다운 부모를 만나 도움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이루게 되는 활동이 된다.


"난 주워온 자식이 분명해."라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집에서 가출한 아이가, 꿈에도 그리던, 자기 뜻대로 되는 '진짜 부모'를 만나서 이러쿵저러쿵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의, 지치지도 않는 소비활동이다.


이러한 소비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부모대행업'이 발달하게 되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일한 불편점은 이 부모대행업이 상담이라는 표현과 동의어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실제로 불편하다.


상담의뢰 문의를 받을 때, "애인이랑 싸웠는데 거기 무조건 제 편 들어줘서 애인이 얼마나 사이코패스로 형편없이 잘못 살고 있는지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말씀해주시는 곳 맞죠?" 등의 질문에 대해 여기에서 제공하는 상담이라는 것이 어떠한 활동인지를 매번 설명해야 하는 일은 몹시 불편한 일이다. 특히나 상담이라고 하는 활동에 대해 이미 특정한 고정관념이 생겨있는 이와 나누게 되는 이러한 종류의 소통은 상담자뿐만이 아니라 그 역시도 불편해진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모대행업의 내용이 상담이라는 형식을 채우는 대표적인 소재가 되어 있다면, 율도국을 세워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이쪽일 것이다. 불편함을 느끼는 자가 우물을 파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실존상담이라고 하는 활동을 부모대행업에서 엄격하게 분리해보자면, 즉 '상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도 실존상담을 묘사해보자면 어떠한 용어가 적절할까?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분석(analysis)이다. 빈스방거와 보스에 의한 초기의 실존상담의 모델은 분명 '실존분석' 내지 '현존재분석'이라는 명칭으로 분석이라는 용어를 적극 차용했다. 이것을 차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정신분석적 기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사사받은 후,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서 실존상담을 전개해나간 이들이지만, 정신분석적 용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실존상담을 묘사하기에 분석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분석은 탐정의 일에 가깝다. 본질적 구조로 가정된 청사진 위에서 단서들을 모아 전체의 그림을 면밀하게 구성함으로써 확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상담은 그 반대다. 청사진은 없다. 이미 전체의 그림이 모호하게 먼저 지각되어 있다. 그것을 의미롭게 언어화하는 것이 주된 작업이 된다. 오히려 영매의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분석을 기각한다면 다음으로 유효한 용어는 해석(interpretation)이다. 해석은 훌륭한 용어다. 그것은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활동인 까닭이다.


이를테면, 한 개인이 유기되었던 과거의 경험 때문에 현재 이 모양으로 살고 있다는 이해를 얻게 해주는 것이, 나아가 그러한 운명 속에서도 열심히 버티며 잘 살아온 최선의 면모를 드러내주는 것이 분석이라면, 해석은 먼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종속관계를 해지한다. 즉, 과거가 일방적으로만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만들어진 '이 모양'에 대한 회복을 먼저 이룬다.


'이 모양'은 '이 존재'다. 죄와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 온전함의 반영이다. 최선 정도가 아니라 최상의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나를 존재하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현재의 존재감을 통해 과거를 바라본다. 그때의 온전함이 어떻게 현재의 온전함과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개방한다. 그것이 의미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분석은 '일어난 일'의 구조를 개인이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이고, 해석은 '일어난 일'의 의미를 개인이 누리도록 돕는 일이다. "난 얼마나 잘 버텨냈던가!"와 "난 얼마나 의미로운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나무랄 데 없는 해석이란 표현은 말만 들어도, 현재와 과거를 함께 신경써야 하고, 존재감과 기억도 함께 회복해야 하는 것처럼, 왠지 모르게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진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이로 인해 더 나은 용어를 찾으려는 시도를 멈출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살펴볼 수 있는 용어는 바로 해명(clarification)이다. 이것은 정착할 만하다. 실존상담의 성공적인 결과를 내담자가 체감적으로 보고할 때 가장 많이 하는 표현은 '단번에 안개가 걷힌 것 같다.'이다. 투명해지며, 정화된 듯한 상태가 된다. 개인이 지금껏 고민하고 고통받아왔던 그 모든 문제가 명료해진다. 뚜렷한 해상도로 모든 것이 다 묘사되어 있는 지도를 보듯이, 내담자가 갖고 있던 전체의 그림이 시원하게 떠오른다. 구조도 의미도 그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이 전체의 그림을 비유적으로 존재의 지도라고도 할 수 있다. 내담자가 존재해온 방식 그 자체, 즉 내담자의 삶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는 지도다. 이 지도를 명료화하는 작업이야말로 실존상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단기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실존상담자는 이 일을 해낸다.


실존상담자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실존상담자는 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실존상담자는 일을 하지 않고, 존재에게 일을 맡긴다. 실존상담자가 하는 유일한 일이란 결국 존재에게 맡기는 일이다.


그런데 존재라고 해서, 어떤 수호령 같은 또 다른 주체가 상담자 대신 상담을 진행한다는 식의 오컬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량을 가진 몸이 상담하게 한다고 비유하면 적절할 수 있다. 실존상담자가 활용하는 핵심도구는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그의 몸이다. 실존 그 자체다.


몸이 지각하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자신의 신체성이, 그리고 신체성이 함의하는 상호주관성의 성질이 적극 펼쳐지도록, 실존상담자는 그 자신을 열어놓는다. 존재가 존재하고픈 대로 존재하도록 그 자신을 개방한다.


'존재는 반드시 스스로를 해명한다.'


여기에는 이 신뢰가 있다. 이에 대한 깊은 신뢰 하나로 실존상담자는 자신을 내어놓는다. 자신이 전략의 주체로 서서 이끌어내고, 버텨내며, 알아내는 그 모든 일을 포기한다.


실존상담자는 모든 상담자 유형들 중 가장 잘 포기하는 이다. 포기가 빠른 이들은 실존상담자의 적성에 적합하다. 실존상담자의 머릿속에는 상담 내내 이러한 생각만 가득하다.


"와, 하나도 모르겠다. 상담 괜히 시작했나봐. 오늘 여기서 다 폭로되는구나. 상담자 인생 끝나는구나."


그리고 머릿속 생각과는 아무 상관없이, 실존상담자의 몸은 알아서 동작한다. 캔버스가 되고 붓이 되어, 현재 그 몸이 접하고 있는 현상, 즉 존재방식을 그려낸다. 상담자의 존재와 내담자의 존재가 협업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개체적으로 분리해 말하고는 있지만, 둘이라고는 할 수 없다. 소리굽쇠로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존재가 그려내는 지도는 소리굽쇠들 사이에서 울리는 파장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명쾌하게 해명(clarification)한 존재는 스스로를 명백하게 해명(justification)한 존재다. 자신의 존재방식이 정당했음을 내담자는 이제 이해하게 된다.


존재는 스스로의 존재방식이 부족한 것이나 잘못인 것처럼 취급받을 때,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움직인다. 존재는 반드시 스스로를 해명하고자 한다. 존재의 본질적 속성이다.


존재는 자신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해명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 굴하지 않는 존재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이, 곧 지금의 존재 자체를 신뢰하는 일이 실존상담자가 상담에서 하는 일의 전부다.


그래서 해명은 아주 좋다.


물이 스스로 맑아지듯이, 해명이라는 용어는 존재가 스스로 일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기에, 실존상담의 작업 및 실존상담자의 활동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으로서 더없이 훌륭하다.


실존해명, 존재가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그 존재방식을 명료화하는 일, 그럼으로써 존재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일, 그러나 이렇게 읽고는 다시 실존상담이라고 쓰기로 한다. 해명되었기 때문이다. 해명된 내담자의 존재방식은 상담실 밖의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찾게 된 의미로 응답하듯이, 해명된 실존상담은 상담의 이름 속으로 복귀한다. 다시 찾게 된 상담의 의미로 응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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