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율로 인과율을 카운터치자

"공간을 찾아: 지옥에서의 탈출법"

by 깨닫는마음씨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아주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사실은 '나와 똑같은 이들이 서로를 견디고 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이는 곧 '자기를 싫어하는 이가 자기를 견디고 있는 곳'의 의미와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자아가 지옥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지옥은 인내의 장소입니다. 버티며 사는 것은 지옥 속에서 사는 생존방식입니다. 그러나 지옥이 먼저 있고 그에 대해 버티며 사는 생존법이 불가피한 선택지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버티며 살고 있기에 바로 그 자리가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내는 타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수치스럽게 경험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생명활동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용서할 수 없는 심리적 요소를 외부로 투사해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용서할 수 없는 대상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결국에는 버티며 살 수밖에 없다고 비장하게 미학적으로 말하곤 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이들이 중시하는 것은 바로 맷집입니다.


고통에 대해, 그 고통을 몸빵해서 받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맷집을 키우고자 합니다.


"정신적 근육이 필요하다." 또는 "마음을 수용할 수 있는 용적을 넓혀야 한다." 또는 "그래, 고통 와봐, 내가 받아줄게! 많이 외로웠지! 이제는 내가 안아줄게!"라는 식의 이야기들은 다 이 맷집을 키우고자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의 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라, 표면적 현상으로 드러난 고통에 대해 그저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강조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계속해서 더 큰 고통을 자신의 삶에 끌어들이게 됩니다. 더 버티고 인내하면서, 고통에 대해 이제는 끄떡없는 강철의 몸을 갖고자 합니다.


실은 우리가 어릴 때 애니메이션으로 자주 접해온 많은 슈퍼로봇들이 이와 같은 강철의 몸을 바라는 이들의 소망을 구현한 상징물입니다. 또 하나의 자아의 신화입니다. 이러한 슈퍼로봇들이 싸우는 방식은 맷집으로 버티다가 필살기로 끝내는 것입니다.


'슈퍼로봇대전'이라는 유명한 게임 시리즈물에서도 게임 내에서 출현하는 캐릭터 유닛들이 슈퍼로봇과 리얼로봇으로 구분되는 가운데, 이 슈퍼로봇들은 앞서 묘사한 전투방식을 취합니다. 두터운 장갑으로 "껄껄." 웃으며 적의 공격을 맷집으로 튼튼하게 방어한 뒤, "자 이제 진정한 나의 용사검을 보여줄게!"라며 고유한 필살기를 집행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슈퍼로봇대전'에서 리얼로봇들이 싸우는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리얼로봇들은 장갑은 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한 대라도 적의 공격을 맞으면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회피율이 대단히 높습니다. 유닛을 운용하는 데 있어 약간의 섬세한 배려만 더해주면, 한 대도 맞지 않고 무쌍을 펼칩니다. 과거의 시리즈작에서는 대표적으로 뉴건담, 서바인 등과 같은 리얼로봇 한 대만 적진에 풀어두면, 알아서 모든 공격을 회피하고 모든 적 유닛들을 혼자서 다 찢어버릴 정도였습니다.


회피 후 카운터 어택, 이것이 리얼로봇이 지옥과 같은 전선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살아남는 방식이었습니다.


노장사상의 장자(莊子)와도 같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살벌한 전쟁터에서도 그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하는 말이 구현된듯한 리얼로봇의 생존법입니다.


그 핵심은 회피율입니다.


『숫타니타파』에도 깨달은 사람을 묘사하는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다시 한 번, 회피율입니다.


리얼은 회피율입니다. 리얼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회피율입니다.


그러나 맷집을 높이듯이, 회피율 또한 높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피율은 다만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포유류의 본성은 기민성입니다. 때문에 민첩성(agility)과 유연성(flexibility)이 높습니다. 사실 포유류를 RPG에서의 직업군으로 분류하자면, 가장 가까운 것은 도둑입니다. 도둑은 원래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포유류가 이처럼 기민한 이유는 항온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유기체적 항상성을 바탕으로 포유류는 가변적인 외적 상황에 대해 빠르게 반응하며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포유류는 자연스레 회피의 달인들입니다.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절대로 환경과 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맷집을 자랑하며 몸빵으로 "그래, 내가 세상 모든 것을 다 받아내겠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포유류는 그저 우아하게 회피합니다. 그 몸짓이 아주 섬세하고 부드럽습니다. 재간둥이 귀요미입니다.


많은 것이 포유류보다 아주 크고 무서웠을 때, 그래서 포유류를 아프게 자주 괴롭힐 수 있었을 때, 또 나아가 지구가 아주 차갑고 불친절해졌을 때, 그렇게 여러모로 세상이 지옥이었을 때, 포유류는 궁극의 회피를 시전했습니다.


구멍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사실 회피의 핵심입니다.


'회피'라고 하는 것은 '공간을 찾는 일'입니다.


공간은 틈새의 공백입니다. 모든 인과율이 끊어지는 자리가 바로 공간입니다. 인과율은 원인으로서의 '있음'이 다시 결과로서의 '있음'을 연쇄하는 것인데, 공간은 '없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술한 지옥의 묘사를 다시 살펴보면, 지옥은 자기가 아주 많이 있는 곳입니다. 나 있음, 나 있음, 나 있음, 나 있음, 나 있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의 있음이 또 다른 나의 있음을 연쇄시키는 자아의 왕국입니다. 하덕규 시인의 '가시나무'의 노래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는' 곳입니다.


지옥은 이처럼 버티고 인내하는 자아가 너무도 많이 있어, 결코 쉬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 버티고 인내하는 자아만 계속 만들어져 영원히 쉬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모든 지옥은 결국 '있음'의 지옥입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지옥은 '있음'이 '있음'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인과율의 지옥입니다.


있음이 가득한 곳에는 없음이 없습니다. 자아만 가득한 곳에는 공간이 없습니다.


똑같은 형태로 있는 나만 계속해서 복제됩니다. 꼴보기 싫은 그러한 나만 지옥에 넘쳐납니다. 숨이 막혀 힘들고, 갑갑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인과율은 엄청난 저주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핵심입니다.


이 인과율을 끊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공간을 찾은 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표현 그대로 공(空)에 접촉한 것입니다.


인과율은 관계를 통해 작동합니다.


그래서 공간을 찾고자 하는 이는 관계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관계를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산 속에서 홀로 여여하게 도인처럼 지낸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절대성을 해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착각하는 그 절대성을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동일한 복제물들, 곧 자아는 이러한 시도가 일어날 때 이를 비난하거나 욕하기도 합니다.


"이 비겁한 자식,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책임을 너만 회피하려고 해? 더불어 살기만 하면 그 어떤 위기도 어벤져스처럼 다 막아낼 수 있는데 그 신성한 책무에서 도망치려고 해?"


하늘에서 지금 막 거대한 운석이 지면과 충돌하기 일보직전인데, 이 대멸종의 위기 앞에서 "더불어 살자!"라는 결코 사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허구의 망상을, 유교훈장님과 같은 근엄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공룡들을 뒤로 한 채, 포유류는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관계에서 벗어나 공간으로 갔습니다.


공간은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없어서 처음으로 사람이 되는 곳입니다.


그렇게 공간을 찾아 회피한 포유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존재의 카운터 어택을 시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제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리얼포유류가 사는 방식입니다.


깨달음의 방식입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본성에 새겨진 회피율의 회복입니다.


회피율이 회복됨으로써, 인과율의 지옥이 끝납니다. 인과율의 지옥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작고 약한 포유류는 약육강식의 비장한 힘의 법칙 속에서 죽는 것이 당연한 인과율이, 포유류의 높은 회피율로 인해 카운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피라는 것은 포유류의 지성으로 상황들을 분석해서 요리조리 빠져 나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잔머리를 굴려 상황에서 도망가는 것은 이러한 회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피는 언제나 카운터 어택과 한쌍의 작용입니다. 카운터 어택이 이루어지려면 언제나 상황 속에 있어야 합니다.


사실 회피는 제대로 상황을 마주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맷집으로 버티고 인내하는 것은 역으로 상황을 가장 무시하는 방식입니다. 더 강한 몸빵으로 그냥 상황을 뭉개보려는 의도입니다. 정확한 약육강식의 논리입니다. 관계의 인과율이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입니다.


회피는 소위 명상적 용어로 탈동일시의 기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도 회피하는 데 성공한 놀라운 포유류인 빅터 프랭클은 이를 '자기초월의 능력'이라고도 부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탈동일시나 자기초월은 현실에서 도망가 자기만의 자폐적 동굴에서 망상의 세계를 창조해 그 세계의 왕이 되는 또 다른 자아의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 아주 섬세하게 응답하는 방식입니다.


인과율의 저주에 따라 작동하는 자아라고 하는 반복적인 반응양식에서 탈동일시하고 자기초월해서, 현실에 정말로 필요한 사실적인 일을 하는 것이 곧 회피입니다.


상황 속에 있되, 그 상황에 갇히지 않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회피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회피는 인과율의 저주로 뒤덮여 자아로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벗어나 그 속박을 '깨는 것'이고, 카운터 어택은 그 세상에 다시 새롭게 자아가 아닌 존재로서 섬세히 '닿는 것'입니다.


회피와 카운터 어택이 뗄 수 없는 한쌍이듯이, '깨는 것'과 '닿는 것'도 뗄 수 없는 한쌍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입니다.


회피율이 높은 리얼사람의 본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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