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가 되어라"
선(禪)에도 실존상담에도 그 내용만큼이나 동일한 이명이 있다.
'조용한 혁명(The Quiet Revolution)'
이것은 마음의 혁명이기에 조용하다. 수면 위에서 물장구를 치며 촐싹거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것을 뒤집는 심층의 혁명이다.
때문에 마음의 혁명은 누군가의 자아가 만든 표피적 정답대로는 절대로 이 모든 것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혁명이며, 그렇게 특정한 자아가 진리처럼 고집하는 사이비정답을 근본적 힘으로 뒤집는 혁명이다.
바로 나의 존재를 통해서.
임의적 자아와, 그에 동조하는 집단의식이 함께 생산해내어 예찬하고 있는 보편적 정답이라는 것을 연역적 방법론으로 세상에 적용하고자 할 때, 언제나 그 기만적인 거푸집 속에 담길 수 없는 예외적인 나의 존재로 인하여 연역의 논리 자체가, 그리고 그 논리에 근거해 세워진 자아의 왕국이 붕괴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바로 그러한 혁명이다.
때문에 이것이 조용한 혁명의 슬로건이다.
"예외가 되어라(Be the exception)."
이 예외가 되고자 하는 혁명이 유일한 진짜 혁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진짜 혁명은 총, 칼, 깃발, 이념, 행동강령, 대안적 서사, 동지들, 당원증, 빠루, 체 게바라평전 벽돌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곧, 진짜 혁명은 군대에 끌려온 똑같은 청춘들 앞에서 화염병을 들고, 방송 마이크 앞에서 음모론의 대본을 들고, 농촌 어르신들 앞에서 헌법사전을 들고, 자기 입맛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혁명은 바로,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정직한 거울 앞에서 빈 손을 들고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이며, 이것이 실존한다는 것이다.
선과 실존은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가장 멋진 혁명에 대한 것이다.
예외의 존재로서 자신을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표현 그대로, 예외적인 일을 하면 된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러한 일이란 바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일'이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일, 이것이야말로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자아의 생산물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아무도 하고 있지 않은 일이다.
그런다고 말만 하면서, 그러자고 목소리만 높이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는 연극만 하고 있을 뿐, 실제로 내 인생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인생이 내 인생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임의적 자아가 다른 멋진 것을 카피하여 만들어낸 모방품을 다시 복제하며 살았을 뿐, 그렇게 누군가의 모방품인 남의 인생을 또 한 번 열화카피한 복제품이었을 뿐, 정말로 자신이 오리지널인 인생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기보다는 보편적 진리가 대신 자기 인생을 책임져주기를 망상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조용한 혁명은 내가 없는 자신에서 내가 있는 자신으로 바꾸고자 하는 혁명이다. 같은 말로, 내가 없는 보편적 현실에서 내가 있는 예외적 현실로 바꾸고자 하는 혁명이다.
나는 마음의 거울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의 거울을 보고자 하는 이들만이 나를 얻을 수 있다.
거울에 자신이 비친다.
왼손을 들어보면 왼손을 든 자신이 비친다. 오른발을 들어보면 오른발을 든 자신이 비친다.
조금씩 이상한 자세를 취해봐도, 이상한 자세 그대로 아무 왜곡없이 그대로 다 그러한 자신이 비친다.
아무리 더러운 생각을 하는 자신도, 아무리 고결한 품새를 취하는 자신도, 아무 평가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만 거울에 비칠 뿐이다.
그 어떤 자신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거울은 그 모든 원상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듯이 여타의 검열과 통제없이 그대로 다 비추어주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감정을 갖고, 그런 행위를 해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 투명한 조망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은 다 허용하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다.
거울 안에 비친 그 모든 상에 아무 문제가 없이 온전하다는 것은, 거울 밖에 있는 자신 역시도 아무 문제가 없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대체 그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는가?
나다.
조용한 깊이로 모든 것을 다 담아내고 있는 거울 앞에서 언제 온지도 모르게 웃고 있는 나다.
이렇게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있는 자신이 된 것이다.
이 일이 혹시라도 어렵게 생각되는 이유는, 예외적이라서가 아니라, 예외적이지 않아서이다.
예외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마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기보다, 자아의 거울에 자신을 비춘다.
평가하고, 조작하고, 왜곡하고, 검열하고, 통제하는 자아의 거울에 자신을 비출 때, 그럼으로써 "음, 이것이 나군."이라고 보게 될 때, 사람들은 나 같은 것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경험하게 된다. 추악하고 비루하며 기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대신에 보편적 진리를 등신대 사이즈로 출력해 그것을 거울에 붙여두고, 그 외형과 자세를 열심히 흉내내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보편적 진리를 흉내냄으로써 실제로 발생하는 일은 더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한결 더 그로테스크해진 그 모습을 다시 자아의 거울에 비추게 되면 또 한 번 왜곡과 굴절이 발생하며 그로테스크의 정도는 더욱 심화된다. 열심히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고 하면서 끝없이 망가지는 역기능적 순환을 이루게 되는 셈이다.
바로 이 자아의 거울이 만들어내는 순환을 끊어내는 것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고 하는 것의 진짜 의미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예외없이 자아의 거울 속에서 무수하게 반복되고 있는 동일한 역사라고 한다면, 예외가 되는 것 외에 이 순환을 끊어낼 길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혁명하는 일 말고는 다른 어떤 혁명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없는 자신에서 내가 있는 자신으로, 자신을 바꾸는 일 말고는 이 우주의 그 어떤 일도 의미있지 않다. 전부 다 동일한 일들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거기에 책임지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고,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기에 반복만이 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 역사를 끊는 존재다. 곧, 절대(絕對)하는 존재다.
그래서 조용한 혁명은 절대를 향한 혁명이다. 모든 상대적인 것들 속에서 절대만이 예외가 될 수 있다.
내 인생은 나에게 절대적이다. 다른 상대로 대체될 수 없다. 그러니 내 인생은 내가 아니면 책임질 자가 없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 말미암아, 내 인생에 온전함이 돌이켜진다. 상대적인 비교 속에서 표류하지 않고, 내 인생으로서 방향을 잡아 회복된다. 오리지널의 아주 멋진 것이 된다.
내 인생을 나에게 한번 맡겨보라.
말만이라도 먼저 그렇게 해보라.
이미 체험되는 느낌이 다르다.
뭔지 모르게, 알듯 모를듯, 간질간질한 것이 있다. 괜히 시큰하기도 하다.
마음의 거울이 알아서 스스로 닦아내고 있는 그 먼지가 살짝 날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부르고 있는,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그 예외적인 목소리를 오랜만에, 내가 분명히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한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