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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심리학으로 인한 고충

"심리상담자의 소회"

by 깨닫는마음씨




15년차가 된 심리상담자로서 지금껏 1000건이 한참 넘는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상담이 가장 힘들었던 경우를 말해볼 수 있습니다.


일단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상담은 재미있는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상담자라는 직업에서 보람보다 더 크게 경험되는 것은 분명하게 재미입니다. 그것은 "아싸! 내가 유능하게 내담자의 문제를 풀어냈어!"라는 자기현시욕에서 비롯한 재미가 물론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되는 재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을 정말로 알아가게 될 때의 감동은 분명 재미의 영역입니다.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큰 재미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합니다.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는 이들만이 서로에 대해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무거운 책무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행위해야만, 자기가 사랑을 떠나게 되더라도 도덕적으로 합리화할 말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모든 것을 다했지만 운명의 장난에 의해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순결한 피해자처럼 자신을 입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들만이 갖는 법입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이는, 사랑의 곁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이는 사랑을 의무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이 여기에 있는데 떠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랑이 이처럼 재미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심리적 고통의 모든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법의 망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내담자들은 이 망각으로부터 깨어나, 다시 사랑하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상담소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심리상담은 결코 특정한 알고리즘이나 방법론의 적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만 하면 다 좋아집니다." 식의 기계론적 활동은 심리상담의 일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만 하면 사랑을 얻게 된다는 말이 얼마나 코미디 같은 지를.


실제로 우리는 그런 줄만 알고, 성적을 올리고, 성형수술을 하고, 인기있는 옷을 사고, 몸매를 가꾸고, 돈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로, 정말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사랑은 그 모든 조건화의 기제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 모든 상대적인 원리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심리상담이라는 활동을 떠올릴 때 '사랑을 향해 여행하는 법'이라는 언술을 함께 떠올리는 편이 낫습니다. 심리상담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핵심에 더욱 근접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소망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짓들, 글쓰기, 노래하기, 그림그리기, 요리하기, 강의하기, 셀카찍기, SNS에 업로드하기 등의 다양한 문화활동들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그 어떤 조건적 기준으로도 사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조건적 기준을 충족시키면 다른 것은 다 얻을 수 있을지라도, 사랑만은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도 동의하십니까?


마치 게임의 퀘스트처럼,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신다면, 우리는 아주 많이 힘들어집니다. 심리상담자들은 아주 많이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상담이 아주 힘든 경우는 바로 이처럼 사랑을 조건화하고 있는 이들을 상담할 경우입니다.


사랑을 조건화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조종과 통제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필연적으로 재미없어집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이미 재미없게 된 이들에게 사랑의 재미를 회복시킬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이란 정말이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들 또한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사랑받고 싶어요."

"제가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전 열심히 했는데 왜 저를 사랑해주지 않는 거죠?"


바로 사랑받고 싶은 소망에 대해 말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러나 여기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전술했듯이, 자신이 어떠한 의무를 실천하는 일이 아닙니다.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는 일이 아닙니다. 타인에 대한 의무의 실천과 조건의 달성은 이미 이들이 많이 하고 있는 항목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된 바로 그 소재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처럼 이들이 사랑을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모종의 방법론에 따라 열심히 행위한 뒤, 그 결과물이 사랑이 아닌 것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우울해하는 것입니다.


대체 이들에게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그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럼으로써 이들뿐만이 아니라 상담자 또한 힘들게 만드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예찬하며 이야기에 빠져 있는 이들, 이들이 바로 상담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이들입니다.


심리학은 분명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연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랑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곧 사랑의 사이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얻는 방법론인 것처럼 작동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표현 그대로 사이비심리학이 됩니다.


이 사이비심리학에 빠진 이들을 상담하는 일은 지극한 고통이 가득한 일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이비심리학에 빠진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수줍고 선량합니다.


수줍고 선량하기 때문에 대단히 고집스럽습니다.


수줍고 선량하다는 것은 껍질이 단단하고 매끄럽다는 말입니다. 고집이란 바로 이 껍질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간직한 사랑의 이야기, 즉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엄청나게 고집을 부립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이들에게 주입한 것은 보통 사이비심리학의 주체입니다. 자신이 심리학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하며 마음에 대한 거짓의 이야기를 세뇌시키는 이들입니다.


사랑이 간절한 이들을 유혹하여, 자기의 말을 모방해서 복제하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렇게 자기 자아의 외연적 확장을 꿈꾸는 이들이 보통 이 사이비심리학의 주체가 됩니다.


이러한 사이비심리학의 주체에게 한번 동의해버리면 그 복구가 아주 힘듭니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상태와 같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기의 인생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던 이가,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를 통해 인정욕을 채우게 되거나, 사이비심리학의 이야기를 따라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경험을 하기까지 한다면, 이것은 성공경험으로 굳어져 더욱 해체되기가 힘들어집니다.


사이비심리학의 영향은 평생 간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조금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할지라도, 금새 자신이 의존해있는 그 이야기로 고무줄처럼 복귀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어떠한 장에 있든, 근본적으로 늘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 모습은 정확하게 사이비심리학의 주체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이비심리학은 세습됩니다.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들 또한 자신이 대단히 선량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년소녀 같은 순수한 수줍음 또한 내비칩니다. 표면적으로 이들은 절대 괴물이 아닙니다. 아주 친절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다른 이들을 염려하고 위하는 진정성의 기운을 풍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본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차피 약한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뜯어 먹히게 될 팔자인데, 차라리 양심적으로만 뜯어 먹는 저에게 뜯어 먹히는 게 낫죠. ㅎㅎㅎ"


이것은 실화입니다.


도무지 무슨 미친 소리인 줄 모르겠습니다.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는 또한 이러한 부분에 대한 비판을 받으면, 고개를 푹 숙이며 비장한 목소리로 회개문을 낭독합니다. 그리고는 사이비의 나쁜 점을 경계해서 늘 자기가 적용하는 이론의 좋은 점만을 반영하겠다고 말합니다. 나쁜 것은 다 걸러내고 좋은 것만을 통합해서 앞으로는 제대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렇게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는, 자신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다 통제할 수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오만함에 힘입어, 앞으로는 언제나 양심적이고 좋은 사람으로서만 전쟁터의 학살현장에 나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쁜 수류탄은 던지지 않고, 착한 기관총으로만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수줍고 선량한 미소로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위해 제대로 하는 좋은 일이라며.


이야기에 빠져 있으면 이처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는 사랑으로 착각하며 자식에게 행하지만, 실제로는 학대를 행하고 있는 부모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사이비심리학의 핵심은 이 부모놀이입니다.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는 그 소재가 무엇이든 간에, 해당소재로 부모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사이비심리학의 주체에게 자기 자신은 언제나 허용하는 자고, 받아주는 자며, 기회를 주는 자로 상정됩니다.


이른바 신입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자아라고 하면 정확합니다.


사이비심리학은 결국 사람들에게 부모가 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하는 자아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자아는 스스로를 은폐합니다.


자기는 이제 미숙한 자아를 벗어나 성장한 척하며, 겸손하고 배려심 많은 모습으로 자기를 위장합니다.


이 은폐의 방식이 바로 가장 오만한 자아가 하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이 자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해보세요. 제가 듣겠습니다. 제가 당신이 주인공이 될 왕좌를 허용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받아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소외된 당신의 이야기가 소중한 당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릴 기회를 제가 드리겠습니다. 저를 진정한 당신의 이야기를 만날 그 감동의 순간에 초대해주십시오."


신이 되고자 하는 자아는 친절합니다.


치맛바람 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대하는 담임선생님처럼 친절합니다. 고객을 위한 무한충성모드입니다.


그러나 진짜 신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신의 고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이 인간의 고객입니다.


진짜 신은, 허용하고, 받아주고, 기회를 주는, 자기가 꿈꾸는 자기 부모상을 연기하는 자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짜 신은, 허용되지 않는 거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아로, 기회가 없는 과부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한 모습의 고객으로 인간을 찾아옵니다.


자아가 절대로 되려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자아는 자기가 거지와 고아와 과부의 구원자이기만을 바랍니다. 물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는 절대로 그들이 되지 않을 항구적 입지를 손에 넣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아가 어떻게 실제의 삶을 회피하려고 하는지의 문제를 시사합니다.


부모처럼 허용하고, 받아주고, 기회를 주는 신이 되고자 쓰는 강박적 이야기를 고집함으로써, 자아는 자기의 삶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실제의 삶에서 눈을 돌리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학대입니다.


아이를 허용하고, 받아주고, 아이에게 기회를 주는 '좋은 부모의 이야기'를 강박적으로 고집하는 부모는 반드시 실제의 아이보다 그 이야기를 우선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좋은 부모]가 없으면 너는 진정한 너로 건강할 수 없다구! 사랑받는 네가 되기 위해 이야기[좋은 부모]는 꼭 필요하다구!"


이야기에 맞춰 아이는 분재처럼 굽혀지고, 뒤틀리고, 쪼그라듭니다.


이것이 학대입니다.


이야기의 치명적인 점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야기에 빠져 있으면 늦든 빠르든 반드시 학대가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언제나 진리가 되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되어야만 더 많은 이들에게 소비되고 더 오래 소비될 수 있습니다. 보급성과 보존성이 확대됩니다.


이것은 자아의 영속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이유는, 자기 자아를 이식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자식을 통해 영속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스라이팅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거짓의 이야기를 진리로 이식시키는 일입니다.


최면이라고도 하고 세뇌라고도 합니다.


이것들이 작동하는 유일한 이유는, 피험자의 동의에 의해서입니다.


왜 동의하냐면, 자기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사랑을 얻게 해준다고 해서 동의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랑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에 동의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에 굶주렸던 아이가, 아빠 이야기를 진리로 잘 따르면 사랑을 줄 거야, 라고 하니까 그 이야기에 동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이는 조건적 사랑이라는 것을 얻게 됩니다.


사실 말로만 가능한 표현이지, 조건적 사랑이라는 것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건적이면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학대입니다.


어떻든 이러한 학대를 마치 사랑의 적격한 대체물인 양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얻은 아이는, 이제 그것이 진짜 사랑인 줄로만 알고, 결국 사랑과 이야기를 연합시키게 됩니다. 이야기 안에 사랑이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수품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것이 가장 힘든 일이 됩니다.


사막에서 낙타가 배설장소로 쓰는 곳에 고인 똥물을 마시고 있는 이에게, 이곳이 아니라 정말로 시원하고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는 오아시스가 있다고 안내하더라도, 낙타의 똥물이 진정한 물이라는 이야기로 가스라이팅된 이에게는 그 자리를 떠나는 일이 매우 힘들어집니다.


조건적 사랑의 최면이 낳은 두려움으로 인해, 똥물이라도 잃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가장 잃어져야 할 것을 오히려 신주단지처럼 가장 지키고 있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보통 사이비 숭배의 항목에서 인지부조화라고 말해지는 현상입니다.


보통 이러한 경우 상담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고 내담자의 눈앞에서 사실을 살아 내담자가 그 사실을 목격하게 하는 일이 거의 유일하게 할 일입니다.


"어, 물 시원하다. 맑고 깨끗하네 아주. 근데 어디 근처에서 똥냄새가 자꾸 나네. 킁킁. 오아시스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나? 물 많이 마시고 이따가 쉬하러 가면 되겠다."


한 12년 전쯤에 국내 상담계에서 유명한 한 대가 선생님의 집단상담에 참여했을 때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참가자분이 한 상대와 관련된 자기의 이야기를 하며 말과 몸짓으로 '진정한 감정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근데 나는 OO씨 이야기에 나오는 상대의 실제 입장이라면, OO씨 이야기에 쉬를 하고 싶어질 것 같애요."


집단상담이 다 그렇듯이, 참가자들 중의 몇몇은 선생님의 이 말에 큰 웃음을 터뜨리고, 또 다른 몇몇은 어떻게 상담선생님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냐며 격렬하게 분노하기도 하는 등, 역동은 더욱 번져 집단상담의 분위기는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걸려 있는 문제들이 효과적으로 잘 낚여 나온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경험을 통해 참가자들 모두가 배우게 된 것은, 이야기에 몰입함에 따라 우리는 그 안에서, 이야기에 의해 의도된 감정을 자기의 진정한 감정으로 착각하기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나아가 아주 많은 경우, 우리는 자기의 진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이야기를 통해 가짜 감정을 '감동적으로' 소비하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야기에 속지 말고, 자신과 상대의 감정을 동시에 봐보세요."


크게 배운 집단상담의 경험이었습니다.


또 다른 삽화도 있습니다.


딱 9년 전에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한 선생님과 7개월 정도의 인연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을 굳이 알기 쉽게 묘사하자면, 그저 선사(禪師)라고 말하는 것이 유용합니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뒤늦게 심리학과에 들어가서 학부 생활을 아주 행복하게 마치고, 그때 은사였던 국내 집단상담의 또 다른 대가인 한 교수님이 차후 교수 자리까지도 고려한 형태로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장학생으로 초대했으나, 돌아다니며 사람들 만나는 것이 재미있다며 그저 야인으로 남은 분입니다.


지금까지 국내외 심리상담쪽 사람들을 만나본 중에서 이 선사분이 분명 가장 상담을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가르치는 곳도 없던 실존상담의 실제를 이 분을 통해 명확하게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작업을 함께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음이 궁금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몇 시간을 통화하며 밤길을 걸었고, 그 안내를 통해 존재를 체험했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이야기 밖으로 나와 사는 현실이 어떠한 현실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밟았습니다.


7개월의 짧은 인연 끝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지만, 그 만남의 감동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존재 안에서 지속됩니다.


잠깐 이렇게 써보고, 글을 이어가보겠습니다.


"강병석님, 사랑합니다. 지금도, 영원히."


이 분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펼쳐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분은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참 친절하게 함께 웃어주고 함께 울어주는 방식으로 잘 들어주는,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과거의 어떤 기억을 되살려 아주 서럽고 애달픈 이야기를 소설처럼 써내려가며 그 이야기에 빠져 바닥을 주먹으로 치고, 테이블을 발로 차며, 음료를 뒤엎고 대성통곡을 할 때도, 이 분은 그저 시큰둥하니 담배를 물고 무심하게 이야기를 듣다가, 아니 정확하게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거기에 그냥 놓아두다가, 한마디를 툭 던지곤 했습니다.


"이제 꿈 다 꿨으면 저를 봐봐요. 제 눈을 보며 말해봐요."


"뭔가 좀 심심하고 쑥스러운데요."


"수치심은 영적 현상입니다."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그것은 마치 극장에서 아이언맨이 "아이, 앰, 아이언맨."이라고 읊조리며 핑거스냅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극장바닥을 발로 탁 튕기던 중에, 갑자기 극장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게 되는 상황과 유사했습니다.


쪽팔려서 얼굴을 붉히며 극장 밖으로 달려나간 이는, 3시간의 상영시간 동안 영화관 밖에서 전신주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친우를 발견합니다.


"다 봤냐? 밥 먹으러 가자."


"아 존나 쪽팔려. 트라우마로 100% 남는다. 글쎄 이런 일이, 주절주절."


"그렇구나. 사람들이 다들 귀엽게 봤겠네."


"응? 내가 귀여워?"


"존나 병신이지."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모든 것이 다 중의적이고, 역설적이며, 아름다운 혼돈인 그 자체로, 마냥 재미있는 일들이었습니다.


사랑?


사랑하고 있는 줄도 모르게, 사랑 속에 늘 잠겨 있었습니다.


사랑은 물에 들어가는 일과 같습니다. 한다고 표현하지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Let it go."의 의미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물의 부력이 자신을 띄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이 역설을 아주 멋있게 표현합니다.


"수용은 수용받을 수 없는 자신이 이미 수용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수용은 사랑의 현대적 대체어로 틸리히가 제안한 표현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억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자기를 억지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속에 자기를 놓아둠으로써 사랑에 개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상담이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을 다루는 활동인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사랑은 사실로만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상담에서 이야기를 소재로 다룬다면, 그것은 내담자를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내담자를 가두고 있는 감옥의 자물쇠가 어떠한 형상으로 되어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그 자물쇠를 따고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는 애초 그러한 자물쇠는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로만 알고 감옥 안에 들어가 있다가 감옥 밖으로 나온 이가 느끼는 것은 가벼움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가볍게 합니다.


"나는 온전하다."라며 우리 자신만 여여한 척 에스프레소 한 잔 내려마시며 우아떨듯이 쏙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것까지 함께 가볍게 합니다.


부력의 작용이 물에 잠긴 이를 가볍게 하듯이, 사랑의 작용 또한 그러합니다.


가벼워서 물에 뜨니 물이 재미있습니다. 더 재미있게 수영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수영하는 이는 물과 지금 사랑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이제 물을 마음으로 치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잠기니 가볍습니다. 가벼우니 마음이 재미있습니다. 더 재미있게 삶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정말로 사는 이는, 곧 실존하는 이는 마음과 지금 사랑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 결국 사이비심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술한 것처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로막는 것이 사이비심리학입니다.


사이비심리학은 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튜브가 있어야 한다며, 이야기 등과 같은 것을 튜브로 꼭 써야 한다고 강요하는 '좋은 부모'처럼 극성스럽게 호들갑입니다.


정성이 아닌 극성으로 언제나 우리를 학대합니다.


"어차피 물에 빠져 죽을 팔자인데, 양심적으로 튜브를 1시간에 100만 원에 빌려주는 저에게 튜브를 빌리는 게 낫죠. 물에 빠져 죽는 것보다는 개인파산해서 고독사하는 게 덜 고통스럽잖아요. ㅎㅎㅎ"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무 조건 없이, 아무 도구 없이, 아무 부모 없이, 그냥 좀 사랑해봅시다.


자신을 한번 던져봅시다.


사랑 속으로.


진심으로 말하건대, 심리상담이라고 하는 이 일이 가장 재미있습니다.


마음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재미있습니다.


진짜로 유튜브보다 재미있습니다.


심리상담은 절대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사랑하고 싶은 이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의 타고난 능력을 회복할 수 있게끔,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그 자신의 존재를 만나도록 돕는 일입니다.


존재는 가볍습니다.


무겁고 비장하고 진중하다면, 때문에 겸손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르다면 그것은 이야기입니다. 진리로 위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표현이 이상하지만, 진짜 진리는 존재뿐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의 존재만이 진리입니다.


심리상담은 이러한 존재의 면모를 알아가는 일입니다.


바로 나를 알아가는 길입니다.


나를 아는 일은 가장 재미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본캐, 부캐처럼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넷플릭스 채널을 돌려보며 멜로영화, 공포영화, 판타지영화, 코미디영화, 독립영화 등을 다양하게 경험하는 그러한 재미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단 하나의 나입니다.


때문에 다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자아가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유비입니다.


마음과 사랑하는 일이 나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를 향하며 존재 그 자체를 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갖는 이라면 그래서 누구나 상담자인 법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과 가장 잘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언제나 최고의 상담자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사이비심리학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사이비심리학이 필요없어지면, 사이비심리학을 비판하기 위한 규정과 기준도 필요없어집니다.


훗날의 소회는, 모두가 다 마음과 사랑하는 최고의 상담자가 됨으로써 더는 상담업이란 것 자체도 불필요해진 현실에 대해 경험한 감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마트에서 창고정리 일을 하면서 "왕년에 제가 심리상담이라는 일을 했었어요. 그런 직업이 있었다는 게 안 믿어지시죠?"라며 구시대의 유물을 흐뭇하게 추억하는 레트로 꼰대가 되어도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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