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의 힘

"여기에서 죽겠다며 현실에 뿌리내린 씨앗이 인간이 되어"

by 깨닫는마음씨




리비도, 무의식, 감정, 느낌, 역동, 생의지, 세계체험(worlding), 생명, 마음,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일까?


힘이다.


그냥 원초적인 힘 그 자체다. 지성적 힘도, 정서적 힘도, 의지적 힘도, 육체적 힘도, 정신적 힘도, 물질적 힘도 아닌, 그냥 힘이다.


스스로의 힘이다. 어떠한 도구나, 대상이나, 자원이나, 재산이나, 소유물이나, 매체나, 체험이나, 방법론이나, 원리나, 이론이나, 언어나, 그밖의 잡다한 그 모든 것에 의존하지 않고 원래 존재가 가진 힘이다.


사실적 존재는 힘덩어리다. 무조건 강한 것이다.


실존은 힘이다. 무조건적인 힘이다.


비단 실존상담뿐이 아니라 모든 심리상담은 다 이 힘의 증득에 대한 것이다. 이 관점을 더욱 분명하게 풀어낸 것은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받은 알프레드 아들러다.


깨달음도 힘이다. 아주 순수한 힘이다. 어떠한 도구 및 대상에 의존함 없이 존재로부터 스스로 솟구치는 힘이다. 전략도, 아양도, 완곡도, 소재도, 술책도 필요없다. 돈, 인기, 명예, 권위, 권력 등에 달린 것이 아니다. 부모의 품속에서 내는 대장놀이의 음색이 아니다. 사실과 하나된 뇌성이다. 쩌렁쩌렁하다.


바로 이 본래적 실존의 힘을 회복하고자 하는 활동이 심리상담이며, 나아가 깨달음의 여정이다.


우리가 본래적 실존으로 살 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목숨을 잘 걸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중력이 작용해 사과가 떨어진다는 것에,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창문 밖에 있는 잎새를 초능력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에,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은 어떤 인간에게도 불가능하다는 것에, 그 모든 당연한 사실에 목숨을 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온갖 다양한 판타지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뿌리가 깊다.


누가 보아도 든든하게 힘있어 보인다.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외모도 없고, 배경도 없는데, 그냥 맨몸으로 당차다.


그런데 이는 지적 전략과 관계적 방법론을 통해 성공한 자수성가인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바닥부터 맨몸으로 시작해 출세했다고 하는 그러한 인물상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돈에 대한 추구로 열심히 노력해 자본없이 재산을 축적한 이에 대한 경우가 아니라, 돈이 없이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에 대한 경우다.


미국의 대표적인 실존심리학자인 롤로 메이는, 전자는 돈이 없을 때나 돈이 있을 때나 돈에 의존해서만이 자기를 세울 수 있는 반면, 후자는 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세우고 있기에 이것이 실존적 인간상이라고 말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스스로 선다는 것이다.


이 스스로 선다는 것 또한, 경제적 독립이나 사회적 독립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했든 아니든 간에, 또 사회적으로 독립했든 아니든 간에, 그런 것들에 영향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그 모습에 대한 의미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다. 우리가 가장 되고 싶어하는 인물상이 바로 실존적 인간상이다. 실존이라는 표현이 언제나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 내용의 차원에서 사실 우리는 실존하기를 너무나 소망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며, 나는 스스로 깨달은 자다." 각기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묘사다. 실존적 인간상에 대한 묘사와 다름없다.


물론 아주 엄밀히는, 이 스스로 서는 실존 또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대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의 차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의존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절대적인 존재의 차원에서 사랑받는다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실존은 영원한 반석과도 같은 존재 그 자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니 그 위에서 든든하게 서있는 일이 가능하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니."라는 말은 실존에 대한 비유로 아주 적절하다.


운동을 해본 이들은 잘 알고 있다. 땅에 든든하게 발을 내딛어야 그만큼 더 힘을 행사할 수 있다.


힘의 실현은 뿌리[근거]의 실현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틸리히는 존재 그 자체를 존재의 근거이자 존재의 힘이라고 불렀다. 아주 절묘한 표현이다.


우리가 실존하지 못하는 것은, 즉 우리가 강해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책임의 의미를 시사한다.


책임이라는 것은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종의 과업에 대한 의무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진짜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 정착한다는 의미다.


책임은 언제나 정착의 의미다.


이러한 비유를 들어볼 수 있다.


어떠한 씨앗이 바람에 날려 하나의 토양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 씨앗이 이렇게 말한다.


"에이 이게 뭐야. 근처에 물도 없고 그늘지잖아. 내가 꽃을 피우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 이가 찾아오기에도 너무 멀구! 난 여기에 뿌리내리지 않을 거야! '여기는 나의 진정한 현실이 아니야!' 진정한 나의 현실은 따로 있다구!"


그러면서 씨앗은 발아하지 않고, 씨앗인 상태 그대로 자신을 유지한다. 언젠가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와 자신을 이상적인 옥토로 이동시켜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씨앗은 결코 꽃으로 실현될 수 없고, 열매로 실현될 수 없는 운명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바로 이것이 망상 속에 빠진 우리의 보편적인 상태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늘 회피하고, 부정하며, 도망친다. 어딘가에는 진정한 자신을 알아주는 현실이 있을 것이라면서,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없으면 자신이 직접 이상적인 현실을 만들 것이라면서.


만성적인 책임회피의 상태다.


존재망각이라고도 부른다.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 삶이라고 부른다. 선(禪)에서는 "꿈꾸고 있구나."라고 말한다.


책임이라는 것은 그러니 눈을 뜨는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거는 것이다.


목숨을 건다는 이 말을 비장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단순하게 이 사실 위에서 죽겠다며 사실적으로 드러나있는 눈앞의 현실에 안착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 뿌리내린다는 것은, 바로 이 현실에서 죽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즉,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지금 눈앞의 여기!"라고 답하는 것이다.


니체도 프랭클도 아주 좋아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답하는 이가 자기를 초극한 자이며, 프랭클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프랭클은 수용소를 자기가 안착할 집처럼 여겼기에 그곳에서의 생활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니 그 정성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의 현실이 열려갈 수 있었다.


이것을 뿌리가 확장된다고 말한다.


잘 안착한 씨앗은 이제 나무가 되어 그 뿌리를 넓게 또 깊게 펼쳐간다. 그럴수록 더욱 든든해지며 힘있어진다.


힘의 증진이란 이처럼 우리가 책임지는 정도에 달려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100%로 선택하는 그 결단에 달려 있다.


스파이더맨의 대사를 뒤집으면 정확하다.


"큰 책임에는 큰 힘이 따른다."


눈앞의 현실이 어떠한 현실이든 그 현실에 책임을 갖고 뿌리를 내리는 만큼, 우리의 힘은 담보된다.


책임지려 하지 않기에 우리는 힘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과되는 노역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책임은 결코 관계적 의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는 어떠한 사건이 다가오든 "그래 와봐. 한번 겨뤄보자고 친구!"라는 소영웅주의의 태도로 임하는 것도 아니고, "에구 왔구나. 그래그래. 내가 다 받아줄게. 괜찮아 이제. 얼마나 소외되어 힘들었을까. 내가 다 알아줄게."라는 민주적 부모의 태도로 임하는 것도 아니다.


대상도, 영웅도, 부모도 아니다. 그러니 관계도, 세상도, 신도 아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할 책임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경계를 분명하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일은 책임지는 일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과 같다.


우리가 나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일을 한다.


나무처럼 경계를 존중하며 성실한 이는 이미 이 일을 하고 있다.


결국 깨달음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일이라고 할 때, 이미 현실에 정직하게 뿌리내려 사는 이는 그 자체로 깨달음과 같은 위상으로 사는 이다. 그러한 이에게는 깨달음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이미 존재의 힘을 집행하고 있는 실존적 인물이다.


눈앞의 현실에 책임지는 척하면서, 실은 씨앗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교묘하게 위장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문어의 생태다.


현실에 안착해있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그것은 단지 빨판을 통한 흡착일 뿐이다.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다. 문어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저는 최선을 다했다구요!"라며 자기의 성실한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는 타인과 세상에게 그 모든 책임을 돌리며, 열심히 빨판으로 자원을 흡착한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를 거듭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어는 필요한 소재들을 모아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실현은 손으로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다리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반석 위에 든든하게 다리가 안착되어야만, 우리는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다. 뿌리가 잘 내려진 나무만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말은 꼰대의 라떼 감상문이 아니라, 실존적 사실이다.


심리상담에서는 그라운딩(grounding)이라는 말을 쓴다. 영성과 심리학을 함께 다루는 분야인 자아초월 심리학의 국내 전문가이자 집단상담의 대가인 김명권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저의 임무는, 여러 판타지에 빠져 둥둥 떠다니는 여러분을 땅으로 끌어 내리는 일입니다."


심리학의 목표는 역설적으로, '심리'라는 단어가 연상시킬 수 있는 모호하고 비실제적이며 마법같은 추상의 영역에서 인간을 건져내어 사실적 토양에 발을 붙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현실화(realization)라고 부를 수 있다. 일본 교토학파의 선(禪) 연구자인 니시타니는 같은 단어를 써서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영역한다. 그의 관점에서 깨달음이란 현실(reality)을 실재(reality)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에서 살지 않을 때, 즉 실존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는가?


힘에 치이게 된다.


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에 대한 피동자가 되어 늘 힘겨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자기를 치이게 하는 그 힘은 사실 자신의 힘이다. 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힘을 자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내면 작업이 아니다. 지적이거나 정서적으로 이루는 도식적인 마인드게임 같은 것이 아니다. 규칙에 따라 체스를 두듯이, 백의 비숍을 전진시키면 반대편에서도 흑의 비숍이 전진될테니, 반대편 또한 이기고 싶어하는 그 절실한 마음의 고통을 잘 알아주어, 화해와 통합의 장을 이루는 관계적 심리극이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잉여적이고 연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일어나는 대로 있어지는 것이 바로 실존하는 힘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이는 그냥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느낌을 자신이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공이 왔으면 바로 던지는 것이다. 그 공을 던져준 존재 그 자체를 향해. 그러니 이는 존재 그 자체를 향해 뛰어드는 일이다. "받아줘."하며 바다에 몸을 맡기는 일과 같다.


바다라고 하니 설득력이 낮다. 연인이라고 비유하자. 연인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이다. "죽어도 좋아."라는 심정이다. 그토록 바라던 연인을 눈앞에서 만났으니 이제 죽어도 좋다, 바로 그렇게 현실에 뿌리를 내려 현실을 얻는 것이다.


힘? 그냥 움켜쥐는 것이다. 바로 확 잡는 것이다.


선에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고, 쉬고 싶으면 쉬라고.


불필요하게 실체를 늘리지 말라는 오컴의 면도날이 일상적으로 실천된 형태다.


자기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그 안전장치로 여분의 실체들을 만들어, 즉 여러 마음작용의 원리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 힘을 최대한 멀리에 두고 통제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조금씩 그 힘을 자기의 안으로 통합하게 됨으로써 언젠가는 힘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선에서의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논쟁을 연상시킨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또는 점진적인 성취로도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그 논쟁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논쟁이 아니다. 깨달음의 체험은 언제나 돈오다. 깨달을 때는 누구나 단번에 깨닫는다. 점수의 방편으로 그 과정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동안 쌓은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깨달음은 돈오로 일어난다. 점수의 가치는 오히려 깨달은 그 이후다. 깨달은 뒤에 닦는 것이다. 『깨달음 이후 빨랫감』이라는 잭 콘필드의 유명한 책 제목과 같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지금 목이 마르다.


점진적으로 그 목이 마른 마음의 다면성을 조심스럽게 살펴가며, "음 이제 온전하게 되었군."이라며 우리는 물을 마시러 가는가?


이것은 상당히 코미디 같은 일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똑같은 일이다. 동일한 존재의 일이다.


결국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의 위세를 어느 정도만큼이나 발견하고 싶은가에 대한 그 문제다.


무조건적으로 강한 존재로 자신을 알고 싶다면, 그대로 이 탐구는 성립되며, 그러한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모험의 여정은 생겨난다. 언어의 놀이터 밖으로, 힘의 주인은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실존은 분명 최대치의 힘을 향한다. 최대치로 주어진 본성 그대로의 힘을 최대치로 발현하고자 한다. 정확하게 힘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받은 것은 다 쓰자는 주의다.


이것은 무슨 스파르타 마초 정력남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존재에 뿌리내려 받은 힘은, 존재를 탐구하는 일에 쓰인다. 존재를 향한 그 모험에 쓰이는 것이다. 다른 곳에 쓰는 일은 낭비다. 절대적인 힘을 상대적인 것에 쓰는 일은 아주 잉여적인 일이다.


다른 현실이 아니라 바로 이 눈앞의 현실에서 죽겠다고 선택하고, 그 선택을 오롯이 자신이 책임질 때, 그렇게 현실에 뿌리내린 그 힘으로 일관되게 살아갈 때, 거창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이는 아주 멋있는 이다. 누가 보아도 멋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멋있는 이를 바로 자신의 모습으로 알고 싶어한다.


우리는 진실로 실존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 더 전하고 싶어도, 달리 전할 말이 없다. 실존이니, 깨달음이니, 힘의 주인이니, 다 충분하지 않은 수사학이다.


그냥 인간이라고만 하자.


또 나라고만 하자.


나스 키노코라고 하는 일본 서브컬쳐계의 유명작가가 있다. 이 작가의 좌우명은 제법 근사하다.


"모든 인간은 강하다."


동의한다.


그리고 '절대적으로'라는 표현을 용의 눈으로 그려 넣는다.


당신이 그렇다는 사실에, 당신의 실존에, 나는 언제나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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