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상회
오늘 낮 팀원이자 대학 후배인 분의 결혼식이 있어서 경주에 가야 한다. 깨버린 시간은 새벽 2시, 지금은 거의 4시가 되었다. 뭔가 억울하지만 오십견으로 아픈 팔이 잠을 깨웠다. 물을 두어 잔 마시고 빵을 녹이고 다시 잠들지 못했다. 딸아이가 생일날 선물해준 [작가의 마감, 정은문고]이란 책을 읽어보고 있다.
2000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영역에서 서울역 쪽으로 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용산 디자인센터]라는 곳이 있었다. 회사에서 디자인 툴에 무지한 신입사원 카피라이터를 위해서 위탁교육을 시켰는데 나는 그곳에서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 그리고 쿽익스프레스의 기초를 배웠다. 배웠다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최근에 그저 BI나 CI 썸네일을 어찌어찌 만들(게 되)었다. 그러기를 6개월, 이 새벽에 문득 한때 나의 브랜드였던 [카피상회]를 디자인해 보았다.
팔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나는, 카피를 팔았다. 회사에 다닐 때에도 카피를 팔고 있었지만 판다는 생각보다는 쓴다는 개념이 훨씬 더 강해서 [카피를 팝니다] 같은 문장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카피를 팔았다. 그랬으니 [카피상회]는 카피를 파는 곳이었다. 수년 전의 9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무슨 카피를 팔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럴듯한 업무는 도무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나는 업무는 [유플러스]의 디지털 콘텐츠의 구성과 카피, [동국제약]의 15초 구성과 카피... 모를 일이다, 애착이 없었던 것인지 기록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기억이 날 것 같지 않다. 무척 열심히 일했을 텐데 무엇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지금의 스타일로 본다면, 카피에 몇 가지를 담고 섞고 붙이고 조여서 팔았을 것이다. 경험, 지식, 지혜, 사랑, 방황, 시선, 관점, 분노, 침묵, 믿음, 반항, 기쁨 같은 것들이 그 몇 가지이다.
어느 날, 서촌을 걷다가 [커피상회]라는 곳을 보았다. 내가 카페를 만든다면 아마 [커피상회]라고 지었을지 모른다. 실은, [카피상회 커피상회]라는 이름을 지어놓기도 했었다. 어찌 되었든, [카피상회]는 아직 내 브랜드인 것 같다. 그래서 [카피 다시 쓰기]라고 해서 가끔씩 카피에 대한 글을 썼던 것을 [카피상회]라는 제목으로 다시 정리하고 덧붙여 더 써보고 싶다. 그래서 이 글도 쓰고 있는 것 같다. 아, 4시 14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카피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그 광고 카피와는 다르다. 물론 나는 20여 년 광고회사에 다니면서 광고 카피를 써왔지만 이제부터는 굳이 광고 카피라고 하지 않고 그저 [카피]라고 하면서, 사람이 마음을 담아 쓰는 모든 말과 글을 카피라고 생각할 작정이다. 부부 사이의 대화라든가 아버지로부터의 편지글이라든가 친한 친구의 거듭되는 농담이라든가 바람결에 실려오는 확성기 소리가 모두 내겐 카피가 될 것이다.
내 꿈은 여전히 카피를 팔아 먹고사는 삶이다. 한 근에 50원 정도면 좋은데, 사실인데 말이나 글은 영겁의 시간만큼 무거운 것이라 한 근에 50원 정도 한다고는 해도 한 줄만 달아도 기백만원쯤 값을 매길 수 있다. 비싼지 싼 지 가늠이 되지는 않지만 카피 값의 기준이 나와 내 가족의 일상과 등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하는 말이나 글이 돈으로 환산되는 것은, 보거나 듣거나 일 것이고 책이나 인터넷이 되겠지 싶다.
요컨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카피를 쓰는 것으로만 9시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카피상회]라는 카피에 그런 마음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