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새로운 향기
오늘은 창밖에 비가 오고 있지만, 요 며칠 날씨가 참 좋았다. 그냥 좋다는 말로는 부족한 설레는 날씨. 이 날씨엔 코트조차 답답하고 무겁다. 가벼운 재킷만 입어도 충분한 살랑살랑한 봄기운이 드디어 시작된 거다. 물론 이러다 몇 번이고 다시 꽃샘추위로 봄인지 겨울인지 들었다 놨다 날씨 요정의 변덕이 시작될 테지만.
나는 오늘과 같은 설레는 봄 날씨를 대학을 졸업한 지 한참 된 지금에도 줄곧 '개강 날씨'라고 부른다. 낮에는 햇살이 내리쬐어 눈치 없이 겨울 옷을 입고 있으면 꽤 덥게 느껴질 정도지만, 저녁엔 살짝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그래, 아직은 껴 입길 잘했다.'라고 안도하는 딱 그 날씨. 이 맘 때가 되면 낯설고 불안정하던 동시에 새로움이 만발하고 별 이유도 없이 묘한 흥분이 감도는 개강 시기가 연상된다. 전공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공간 시간엔 부리나케 학교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새로운 인연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해가 지면 학교 앞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를 마시다 잠깐 밖으로 나가 맑은 봄 밤공기를 쐬며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도 한다.
왜 그렇게 개강 시기가 들떴을까. 그때는 힘들었던 수험 생활이 끝나서 마냥 좋은 줄 알았다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대학생의 학기 초 매일매일은 새로움의 연속이었다는 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특히나 신입생 때는 마주하는 사람들, 장소, 분위기, 심지어 지루한 수업 내용 조차 다 새로우니까.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재미없는 이유는 새로움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비슷한 일에 갇혀서 쳇바퀴 돌듯이 꾸준히 고통받고, 혹여나 새로움이 생기더라도 말 그대로 새로운 고통이 생긴 것일 뿐이다. 그래서 다들 어떻게든 회사 밖의 무언가를 만들어 인생에 새로운 재미를 넣으려고 한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캠핑과 골프가 되고, 누군가에겐 결혼과 육아가 되고, 누군가에겐 퇴사와 창업이 된다.
개강 날씨가 도래했음에도 설렐 일 하나 없는 불쌍한 직장인이지만 여전히 잔뜩 미화된 과거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떠올린다. 할머니가 된 후에도 봄이 올랑 말랑한 계절에 개강 날씨라며 호들갑을 떨지도 모르겠다. 올해 개강 날씨 기념으로는 아무래도 돈을 좀 써야겠다. 그게 바로 개강한 학생이 누릴 수 없는 유일한, 직장인의 개강 날씨를 즐기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