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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Aug 02. 2024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나를 바라보다

인간이 가진 각자의 자아의 영역은, 마치 심해나 우주처럼 미지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도 끝도 없는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퍼즐 조각은 곧,

나를 정의 내릴 때 세어지는 하나의 울타리가 되곤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울타리들은 때론 어딘가가 부서져 는 것도 있, 몇 번이고 못질이 되어 단단해진 것도 있으,

예쁘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먼지가 쌓인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는 것도 있다.


각각의 울타리들은 내가 정의 내린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ㅇㅇ을 만났을 때의 ', 'ㅇㅇ선생님과 있을 때의 ', 'ㅇㅇ에서의 ' 같이 내가 속한 관계 혹은 환경에 따라 나뉘어 는 게 있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 '집순이인 ', '일본어를 좋아하는 ', '만들기를 잘하는 '처럼 누군가에게 나를 간단히 나타낼  필요한 것 있다.


그리고 25살이  지금은 새로운 울타리보단 깊게 뿌리 박힌 것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전에 내가 정의 내린 것들이, 이제는 나를 정의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필요한 자아들을 꺼내면 되었고, 더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나 정체성 혼란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굳이 새로운 나를 찾아보려는 노력이나, 기존의 울타리에서 속이 썩어가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만 지내도 별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아무런 발전도 변화도 없이 그 상태에 안주하게 되었고, 나 자신에게 흥미가 떨어져 갔다.


인간관계나 취미,  어떤 것이라도 흥미를 잃으면 더이상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기란 힘들어진다.

그게 행여 '밖'이 아닌 '안' 되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에게 흥미가 떨어져 버린 이상, 점점 사랑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내가 없어진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참 많이 들여왔다고 믿은 나였지만, 지금 내 상태가 바로 위와 같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 내가 상실되어 가기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어 왔고, 그대로 방치되어 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 속의 나는 내 의견보단 남의 의견에 맞추려 했고, 남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두었으며, 남이 원하는 게 뭔지 캐치하는 데 집중했다.

모든 상황에서 나의 모든 센서는 '안'이 아닌 '밖'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안'을 잠깐 비추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했으며, 어떻게 했어야 남이 좋아해 줬을지 혼자서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내 대인관계에서는 싸움이나 분열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속의 나는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나에게서까지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대체 나는 무슨 삶을 살고 싶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이렇게 모든 곳이 망가져버린 나를 외면해서까지.. 대체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앞으로 난 그 상처투성이의 나를 위로하고, 치료하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의 치료법은 이미 이루어졌다.

바로 '상처 입고 숨어버린 나를 발견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그녀가 감춰왔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대화는 나와 타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나와 나의 내면 사이에서도 필요한 것이 대화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나는 그녀의 마음을 찬찬히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마지막엔 그녀의 진심 어린 웃음이 내 마음속에 와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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