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거리두기
나와 이어져 있는 모든 관계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는 것을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당시엔 외로움과 불안,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힘들 지경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행여라도 내가 이어온 관계들에게까지도 해당하는 말이 될까
그렇게 모두에게서 멀어져, 결국엔 혼자가 되어 버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십대 중반이나 되고서도 혼자가 된다는 게 뭐가 그리 두려웠던 것일까
인생은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때까지의 난 그들과의 “ 연결 ” 로부터 나의 존재를 찾기 바빴고
그렇게 나의 시간과 노력을 과하게 쏟아부었다.
이게 잘못된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 시간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 삶의 방식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볼 시간이 많아졌고
내가 혼자 지낸다고는 했었지만, 정확히는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이모께선 내가 정말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일 정도로 깨어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런 이모와 인생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정한 “ 나 ” 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 네가 원하는 대로 가자. ”
“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말해줘. ”
남들에게 항상 맞춰주며 살았던 내게 이모께선 항상 그 선택권을 쥐어주셨다.
처음엔
‘ 어떻게 해야 하지? ’
‘ 어디로 가야 하지? ’
‘ 무얼 해야 이모께서도 좋아하실까? ’
라며 머리를 굴리기 바빴었는데
이것이 계속 지속되다 보니,
나도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내 취향을 따라 매뉴판을 보고,
내 마음이 향하는 대로 길을 걸어 가고,
심지어는 이 노래 말고 다른 노래를 듣는 건 어떻냐며 말까지 꺼내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주관이 없었거나,
있어도 없는 척했던 나에게는
이것은 큰 변화이자 새로운 출발을 뜻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아침 해가 뜨기 직전, 새벽녘 옅게 낀 안개처럼 희미하기만 했던 나라는 존재가 선명해지기 시작하니,
나의 존재감을 타인과의 연결고리 안에서 찾으려 했던 나의 생각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
즉 나의 가치는 오롯이 나로부터 생겨나고,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타인에게서 찾는 것 자체도 잘못된 생각이지만,
만약 그렇게라도 찾으려고 든다면
나라는 사람을 내 삶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연결로 인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기에,
그들과의 연결은 내 존재의 이유가 되고,
그 연결이 끊어지면 나라는 존재는 죽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 연결 ]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될수록
타인에게 모든 것을 맞춰줌과 동시에 나는 뒤로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내 삶에서 나라는 사람은 사라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관계에 집착하며 지내던 내가
모든 관계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들을 보내면서
“ 나 ”를 찾게 되었다.
내 안에 “ 나 ”라는 사람이 다시 깨어나자,
그전까지는 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정리가 필요한 관계들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 또한 그동안의 내 일상에선 익숙하지 않은 큰일이었기에
내가 이기적인 건 아닌지, 내 판단이 잘못된 건 아닐지
이런 내 행동으로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지
습관처럼 나를 향해 칼을 겨누고서 고민을 하고, 겁을 냈다.
그렇지만 바뀌고 싶었다.
지금까지처럼 희생만 하고서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기에
나는 이전의 나로부터 바뀌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렇게 불안을 감내하며 내 결정을 실행에 옮겼다.
처음엔 그렇게 어렵더니
두 번째는 조금 더 수월했고
세 번째는 두 번째보다도 더 수월해졌다.
그와 함께 삶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가벼움이 아니라
해방감, 자유로움으로부터 느껴지는 가벼움이었다.
그렇게 난 관계가 오래되었든 깊든 상관없이
내 판단하에 결정을 내리는 것을 몸소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