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
그 틈새 위에 선 남자

전설의 서막

by 허유영

중국이 한국에 대해 무비자 정책을 시행한 이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중국 관광지는 단연 상하이다. 상하이의 웬만한 핫플레이스에 가면 한국어가 흔하게 들리고, 맛집마다 줄 서서 기다리는 한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상하이는 오늘날 국제 금융의 중심지 중 하나다. 황푸강(黃浦江)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강 서쪽을 뜻하는 푸시(浦西) 쪽에 있는 와이탄(外灘)에는 1킬로미터 남짓 이어진 유럽풍 건축물들이 장관을 이룬다. 반세기 전 열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거리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강 동쪽의 푸둥(浦東)에는 동방명주탑을 비롯한 마천루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과거 '진흙 나루터'라 불리던 이곳은 이제 상하이의 미래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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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탄에서 바라본 푸둥의 마천루

그런데 19세기만 해도 상하이는 아주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던 곳이 이렇게 화려한 대도시로 변한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아픈 상처가 자리하고 있다.


1842년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배 후 체결된 난징조약을 통해 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상하이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그때부터 유럽식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외국 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되는 창구가 되면서 작은 어촌 마을이던 상하이는 빠르게 국제적인 대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여러 나라의 조계지가 들어서자 한 도시 안에 서로 다른 통치 체계가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이 형성되었다. 하나의 도시를 세 개의 주체가 통치하고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이러한 구조는 세계 도시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데, 이처럼 기이한 구도를 ‘일시삼치사계(一市三治四界)’라고 부른다. ‘일시’는 하나의 도시, 즉 상하이를 의미하고, ‘삼치’는 도시 안에 동시에 존재했던 세 개의 행정 관리 체계를 가리킨다. 영국과 미국이 공동 관리하던 공공 조계, 프랑스가 관리하던 프랑스 조계, 그리고 중국 정부가 관리하던 화계(華界)가 그것이다. 또한 ‘사계’는 공공 조계, 프랑스 조계, 자베이(閘北), 난스(南市)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던 상황을 뜻한다. 자베이와 난스는 모두 중국 정부가 관할하는 화계에 속했지만, 조계지에 의해 남북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영국과 미국이 주도한 공공 조계는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와이탄을 따라 늘어선 웅장한 서양식 건축물들은 이곳이 동아시아 무역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는 영미식 법체계가 적용되었다. 그 옆의 프랑스 조계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샤페이루(霞飛路)를 따라 늘어선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고급 주택가, 카페와 레스토랑은 마치 유럽의 한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곳에는 프랑스식 생활양식이 깊이 스며 있었고, 프랑스 법률 체계가 적용되었다. 반면 중국 정부의 관할 아래 있던 화계 지역은 빈민가와 공업 지대가 뒤섞여 있어, 조계지의 화려한 모습과는 대조적인 상하이의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 네 구역의 경계는 단순히 지도 위의 선이 아니라 철조망과 검문소, 순포(巡捕, 경찰)들의 시선을 통해 직접적으로 와닿는 현실이었다. 세 관리 기구는 각각 서로 다른 법률 체계와 공식 언어를 사용했으며, 각 구역의 문패 번호 체계나 전차 궤도, 전압 기준 등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자베이에서 난스로 가려면 전차 궤도가 서로 달라 여러 번 전차를 갈아타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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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식적인 조계지는 아니었지만 일본은 도시 북동부의 훙커우(虹口) 지역을 중심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상하이가 개항된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훙커우 일대에 모여 살며 집단 거주지를 형성했고, 인구 규모를 기반으로 공공 조계 내부에서 발언권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후 훙커우 일대의 치안 업무를 사실상 일본 측이 담당하게 되더니, 1925년에는 급기야 일본 해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결국 훙커우는 법적으로는 조계지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지배 아래 놓인 사실상의 점령지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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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조계지 시절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상하이,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


1932년 중국에 처음 모더니즘 문학을 도입한 작가 무스잉(穆時英)의 소설 〈상하이 폭스트롯〉의 첫 문장이다. 이 짧은 한 마디는 1930년대 상하이를 가장 예리하게 압축한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국처럼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지만, 그 뿌리는 지옥에 박혀 있었다.

화려하고도 경박한 시대였다. ‘극동 제일의 무도회장’이라고 불리던 파라마운트 댄스홀에서 밤새 재즈가 멈추지 않았고 무희들의 치맛자락이 꽃잎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샤페이루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는 커피 향기가 감돌았다. 사람들은 폭스트롯의 리듬 속에서 모든 것을 잊은 채, 마치 내일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춤을 추었다. 하지만 화려한 네온사인의 그림자 속에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 감춰져 있었다.


시체가 옮겨지고 공터에는 가로 한 줄과 세로 한 줄의 도랑과 철골, 잔해가 널브러지고 무엇보다 현장을 적신 그의 피로 흥건하다. 그 피 위에 시멘트가 깔리고 철골이 쌓이고 새로운 호텔이 세워진다! 새로운 댄스홀이 생겨난다! 새로운 건물이 조성된다!


이것이 ‘지옥 위에 세워진’ 풍경의 실체였다. 모든 마천루와 호화로운 댄스홀은 노동을 착취당하다 죽어간 밑바닥 생명들 위에 세워졌다. 상하이의 번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8.jpg 상하이 영화촬영세트장 '영시낙원(影視樂園)'에 복원된 파라마운트 댄스홀

조계지로 몰려든 난민들은 좁디좁은 쪽방에 모여 살았고, 화계 지역의 공업 및 상업 중심 지구였던 자베이는 두 차례 전쟁에서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상하이 최대 빈민촌이 되었다. 하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와이탄의 피스호텔(Peace Hotel, 和平飯店) 커피숍에서는 외국인과 부유한 중국인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유리창 너머의 난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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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탄의 페어먼트 피스 호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경계를 넘나들었다. 아침에 조계지의 쪽방을 나와 외국계 전차를 타고, 낮에는 화계의 공장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다시 조계지의 좁은 골목으로 돌아왔다. 하루에 ‘세 나라’를 오가며 사는 일상은 상하이 사람들에게 특유의 생존 본능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이면서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계산적인 영민함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묘한 공존이 특이한 ‘틈새’를 낳았다. 전통적인 권력 질서가 작동하지 않고, 서로 다른 권력이 마주치는 곳의 관할 공백은 다양한 세력이 살아남는 토양이 되었다. 당시 청방(靑幫)은 바로 이 틈새를 가장 잘 활용한 조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게임의 법칙을 가장 정확히 꿰뚫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두월생(杜月笙)이다.


두월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속한 ‘강호’를 알아야 한다. 그 강호는 청방(靑幫)과 홍문(洪門) 두 개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홍문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청방은 청나라 옹정 연간(약 1726년)에 운하에서 일하는 선원들의 상호부조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원래 반청복명(청나라 타도, 명나라 부흥)을 주장하는 홍문 출신이었다가 청 조정에 고용되어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해상 운송이 발달하고 운하가 쇠퇴하면서, 청방은 운하에서 도시로, 선원에서 부두 노동자, 상인, 건달로 그 활동 무대와 성격을 바꾸어 갔다. 이 와중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뒤섞이고, 행정 구역이 나뉘고, 사회 문제가 쌓여 있던 상하이는 비밀조직이 성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토양이었다.

1888년 귀절(鬼節)이라고 부르는 음력 7월 15일에 태어난 두월생은 장쑤성(江蘇省) 촨사현(川沙縣), 오늘날 상하이 푸둥신구) 가오차오진(高橋鎮) 근처에서 태어났다. 중국 근대사에서 그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도 드물다. 가난에 허덕이던 과일 노점상 종업원에서 출발해, 상하이의 밤을 지배하는 상하이 3대 거물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 궤적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운명은 시작부터 그에게 가혹했다. 네 살 이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일곱 살 때는 계모마저 행방불명되자, 어린 두월생은 순식간에 의지할 곳 없는 고아가 되었다. 생존을 위해 그는 찻집과 도박판을 오가고 온갖 잡일을 전전하며 근근이 굶지 않고 살았다.

열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작은 보따리를 메고 상하이로 와서 스류푸(十六鋪) 부두의 과일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상하이의 온갖 인간 군상을 접하며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서서히 익혔다. 사람들은 그를 ‘라이양리(萊陽梨)’라고 불렀다. 산둥(山東) 지방의 유명한 배 품종을 뜻하는 말인데, 그의 과일 깎는 솜씨가 좋아 썩은 부분을 정교하게 도려낸 뒤 좋은 부분만 팔았기 때문이다. 또 썩은 배를 잘게 썰어 설탕에 절여 파는 등 장사 수완이 남달랐다. 하지만 이 과일가게 일꾼이 훗날 상하이의 전설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두월생은 도박벽이 심했다. 한 번은 물품 대금을 유용해 탕진한 뒤 말도 없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가게 주인은 그를 용서했을 뿐 아니라 다시 데려다 일하게 해 주었다. 세상의 냉혹함을 숱하게 경험한 두월생에게 이 경험이 가슴 깊이 남았다.

부두에서 수많은 일을 보고 겪은 두월생은 상하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뒷배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아무리 힘이 세도, 조직이라는 울타리 없이는 언제든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 깨달았다.

결국 그는 청방의 중간 간부인 진세창(陳世昌)을 찾아가 두목으로 모시며 정식으로 청방에 입문한다. 진세창은 상하이 샤오둥먼(小東門) 일대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던 인물로 거물은 아니었지만, 스류푸 부두 일대에서 조직을 이끌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선택은 두월생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청방에 입문함으로써, 부두를 맴도는 건달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강호 인물들을 만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훗날 그의 귀인이 되는 황금영(黃金榮)과의 만남이었다.


두월생 젊은 시절 사진.jpeg 젊은 시절의 두월생 출처 : 바이두

황금영은 당시 상하이의 이름난 거물이었다. 프랑스 조계의 경찰인 순포방의 총탐장(總探長) 출신으로 순포 신분과 암흑가의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두월생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그는 “제법 기세가 있다”며 측근으로 거두었다. 두월생에게 이것은 운명적인 기회였다.

스무 살의 나이로 황금영 밑으로 들어간 두월생은 과거의 나쁜 습관을 모두 버렸다. 매춘과 도박을 철저히 끊고, 말수를 줄인 채 냉정하게 주위를 관찰했다. 황금영과 그의 부인 임계생(林桂生)부터, 아래로는 가장 낮은 하인까지, 모든 이의 성격과 생활 습관을 꼼꼼히 파악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월생은 아주 중요한 결론을 얻었다. 바로 부자가 되려면 아편을 팔아야 한다는 것. 그날부터 그는 아편과 관련된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목표는 ‘아편을 빼앗고 되찾는 판’에 끼어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황공관(황금영의 저택)에서 일이 터졌다. 아편 자루를 싣고 오던 인력거가 실종된 것이다. 황금영은 외출 중이었고 부하들도 자리에 없었다. 임계생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그때, 두월생이 나섰다. “사모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임계생은 비쩍 마른 그가 못 미더웠으나, 당장 보낼 사람이 없자 권총 한 자루를 내주었다. 두월생은 권총과 비수를 품에 넣고 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도둑이 감히 황금영의 세력 기반인 프랑스 조계지에 머물러 있지는 못할 것이고, 상하이 현성은 밤이 되면 성문을 닫으므로 영국 조계지로 도주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곧장 인력거를 잡아 타고 프랑스와 영국 조계지의 경계 지점으로 인력거를 몰았다. 과연 골목 어귀에서 무거운 짐을 실은 인력거를 발견했다. 두월생이 그 앞을 가로막고 권총을 겨누며 낮게 읊조렸다.

“형제, 자네 일은 실패했어. 내려오게.”

도둑이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지 묻자, 두월생은 상대에게 총이 없음을 간파했다. 총이 있었다면 묻기도 전에 총을 쏘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세를 잡은 그는 총을 허리에 꽂고 도둑을 안심시킨 뒤 그에게 제안했다.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네. 은 2냥을 줄 테니 인력거를 황공관까지 끌어다 주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네.”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놀란 도둑이 바닥에 엎드려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두월생이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순순히 나를 따라 돌아가게. 횡재는 못 했어도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걸세. 황공관은 함부로 피를 보는 곳이 아니니 긴 말 말고 따라오게.”

두월생은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오직 치밀한 추리력과 상대를 압도하는 담력만으로 범인과 장물을 완벽하게 회수했다. 게다가 홀로 아편을 되찾아온 공을 내세우며 의기양양하게 굴 법도 했지만 임계생 앞에서도 그저 담담했다.

"물건은 옮겼고 사람은 거실에 있습니다. 처분해 주십시오."

과연 임계생은 도둑을 처벌하지 않고 놓아주었다.

당시 상하이의 유명한 여걸이었던 임계생은 이 일로 두월생의 대담함과 치밀함에 감탄했고, 귀가 후 소식을 들은 황금영 역시 두월생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얼마 후 황금영이 젊은이를 시험해 보고 싶어 그를 데리고 도박장에 갔다. 두월생이 단숨에 2천 대양(大洋, 중화민국 시절 화폐단위)을 따자 황금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돈으로 술, 유흥, 도박을 하면 그냥 양아치이고, 집을 사고 장가를 가면 돈에 눈먼 놈이라 훗날 딴마음을 품을 것이다.’

두월생은 이 거금을 어떻게 썼을까? 그는 먼저 옛 스승 진세창과 은인들을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했고, 과거 강호에서 함께 고생한 형제들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 심지어 빚진 액수의 두 배를 갚은 경우도 있었다. 열여섯 살 때 자신을 감옥에서 빼준 기생에게도 200대양을 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황금영은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죽고 나면 황푸강기슭은 두월생의 것이겠구나.”

그의 예언은 훨씬 빠르게 실현됐다. 불과 10년 후, 황푸강기슭은 정말 두월생의 세상이 되었다.


1921년경, 훗날 국민당 군통이 된 대립(戴笠)이 아직 상하이 도박장을 어슬렁거리는 하찮은 건달에 불과했다. 어느 날 그가 두월생의 도박장에서 주사위를 던지는 도박을 했는데 솜씨가 뛰어나 돈을 많이 땄다. 도박장 직원들이 그가 속임수를 쓴 줄 알고 손 봐주려 하자, 대립이 두월생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두월생은 대립을 만나 기술을 직접 보여 달라 했고, 과연 대립의 훌륭한 기술을 보고 크게 칭찬했다. 이렇게 머리와 손이 빠른 사람은 범상치 않다고 판단한 두월생은 그 자리에서 대립과 의형제를 맺고 형제라 불렀다.

이후 두월생은 황금영에게 친필 추천장을 받아 장개석(蔣介石)에게 보내며 대립이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 덕분에 대립은 훗날 민주당 군통 특무의 수장이자 장개석이 가장 신뢰하는 심복이 되었고, 두월생도 대립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한편 임계생은 황금영의 부하들이 대부분 비단옷을 입는데, 유독 두월생만 매일 푸른 무명 바지저고리 차림인 것을 눈여겨봤다. 갈아입어도 늘 그 한 벌 뿐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임계생이 알아보니, 두월생이 돈을 벌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남의 일을 해주고도 돈을 받지 않는 탓에 궁색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임계생이 황금영과 상의해 두월생을 좋은 자리에 앉혔다. 프랑스 조계지의 3대 도박장 중 하나인 공흥기(公興記)의 경호원으로 일하며 봉급을 받게 해 준 것이다. 이것이 두월생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1925년, 두월생은 황금영, 장소림과 함께 삼흠공사(三鑫公司)를 열어 프랑스 조계지의 아편 거래를 독점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 두 사람과 함께 ‘상하이 3대 부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상하이의 가장 큰 돈줄은 부두, 아편, 도박이었다.

서열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청방 조직에서 황금영이 두월생보다 높은 서열이었지만, 상하이의 권력은 서열보다 돈과 인맥, 판단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두월생은 차츰 조직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두 사람도 겉으로는 서열을 지켰지만 실제로는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두월생이 급부상한 첫 번째 큰 계기는 돈의 흐름을 장악한 것이었다. 아편 유통을 독점했으니 엄청난 돈줄을 잡은 셈이었다. 돈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따르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정보가 쌓이며, 정보가 쌓이는 곳에 정치가 개입된다. 상하이라는 도시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두월생 사진.jpg 중년의 두월생 출처 : 바이두

하지만 두월생을 진정으로 상하이 권력의 중심으로 밀어 올린 사건은 1927년의 격변이었다. 공산당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킨 장개석이 도시를 통제할 힘이 필요해지자 두월생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지하 권력인 그가 중앙 권력과 손을 잡게 된 사건이었다. 두월생은 황금영, 장소림과 함께 장개석을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공산당 혁명가인 왕수화(汪壽華)를 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선택은 두월생에게 새로운 정치적 힘을 쥐어주었다. 그는 더 이상 깡패 두목이 아니라 상하이 정치와 경제를 연결하는 인물이 되었다. 장개석은 그 공로로 두월생에게 육해공 총사령부 고문, 군사위원회 소장 참의 등 직함을 주었다.

이 시기 상하이 암흑가는 두월생, 황금영, 장소림 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황금영은 프랑스 조계 경찰 인맥을 기반으로 한 원로 두목이고, 장소림은 군벌과 정치권 인맥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으며, 두월생은 그 사이에서 금융과 사업, 정치 인맥을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며 거침없이 부와 권력을 키워 상하이의 실질적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된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권력도 역사의 격랑 앞에서는 무력했다.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그리고 1949년 국공내전의 공산당 승리까지, 두월생은 격변하는 시대에 떠밀려 결국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향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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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탄 만국 건축물마다 오성홍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그가 걷던 와이탄은 여전히 그 모습을 그대로지만, 그 건물들 위에 펄럭이는 깃발은 이제 더 이상 타국의 것이 아니다. 지금 와이탄을 거닐다 보면, 1킬로미터 남짓 이어진 만국 건축물마다 붉은 오성홍기가 유난히도 많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나치게 많다 싶을 만큼 꽂혀 있는 그 붉은 깃발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닐 것이다. 자국의 땅을 타국에 내어주어야 했던 뼈아픈 역사, 그 굴욕의 시간에 대한 집단적 보상 심리이자, 다시는 이 땅의 운명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중국인들의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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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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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상징이 된 와이탄의 야경

다음 편에서는 두월생이 청방의 거물이 된 뒤의 이야기와 그를 실제 모델로 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격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치밀하게 그려낸 그 영화는 내가 청방의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영화 속에서 우리는 시대의 낭만이 찬란하게 피어났다가 쓸쓸히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참고 자료

《두월생 야사(杜月笙野史)》(왕쥔(王俊) 편저)

《두월생전(杜月笙傳)》(장쥔구(章君糓), 루징스(陸京士) 감수)